결혼 후 몇 해동안 그는 묵묵히 오빠에게 무릎을 꿇었다. 가족으로 요구받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처가에 드나들었고, 사위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아픈 장모를 모시고 다니며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자기 할 바를 하는 평온한 모습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남동생의 기나긴 암투병 동안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해내는 것, 동생을 태우고 전국 각지의 요양병원을 오가는 것도 베스트 드라이버인 그가 있어서 해낼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맘껏 슬퍼할 수 있었다. 영정사진 앞에서 조용히 앉아 엄마를 떠나보내는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자식이 해야 할 임무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나를 대신해서 그가 해준 덕분이었다.
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는 고향을 잃었다. 엄마의 49제에 고향에 가지 않았다. 오빠의 애도 방식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그는 나와 함께 성당에 가 주었다. 결혼 후 10년 넘게 냉담 중이던 우리는 어머니 연미사를 드리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고 냉담을 풀었다. 둘이서 시골 작은 성당에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연미사를 드렸다.
어느 해 여름. 오빠는 나에게 아주 급하게 자신의 논문 교정 교열 및 윤문 작업을 부탁해왔다. 나는 오빠의 부탁을 거절했다. 오빠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에 대해 분노 폭발하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나를 공격해왔다. 전화기 너머로 오빠가 당장에라도 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의 지시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폭언과 폭행으로 공격하는.
어린 시절, 희미한 기억 한 조각. 무의식은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으나 몸에 남아있는 감각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목에 와닿았던 감촉, 날카로운 칼 끝의 냉랭한 기운과 공포, 폭력적인 광기, 성난 야수의 얼굴이 섬뜩한 섬광으로 남아있다. 가슴은 얼어붙어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죽일 테면 죽여봐라’라는 심정으로, '찌를 테면 찔러보라'라고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오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오빠가 아닌, 오빠가 훼손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다. 어떤 진심도 가닿을 수 없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생각이다. (중략) 두려웠다. 정수리 흉터와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해야 했던 팔꿈치 같은 곳이 욱신거렸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 안보윤의 소설 <완전한 사과>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말했다. "제주도가 아니니 천만다행이지. 한밤중에 비행기 타고 달려올 순 없으니까. 만약에 제주도였다면 (오빠는) 당장이라도 (우리 집으로) 달려왔을 거야." 속으론 불안에 떨면서도 두려움을 감추고 웃어넘기듯이 농담조로 말하는 나에게 그가 응답했다. "만약에 그러면 이제는 나도 가만있지 않지.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손대면 그땐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내 가족을 건드리는 건 용서하지 못하지."
경찰에 신고해서라도, 아님 맞서 싸워서라도 나를 지켜준다고 했다. 과거에는 묵묵히 모욕을 감수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더 폭력이 발생한다면 더 이상 폭력을 그냥 묵과하지는 않을 거라고. 오빠의 폭력과 공격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든든했다. 나의 편이 생긴 것 같아 든든했다. 남편으로 그는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그가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안심했다. '오빠가 쳐들어오더라도 공격받지 않을 수 있겠구나, 그가 나를 지켜주겠구나, 나의 가정을 결코 공격당하도록 폭력 당하도록 그대로 두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으로 나는 든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빠의 전화를 받게 될까 두려웠다. 전화기를 꺼버리고 3박 4일 동안의 피정에 들어갔다. 피정은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오빠로부터의 도망이었다. 이후에 오빠가 우리 집에 쳐들어 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있어 덜 불안했고 덜 무서웠다. 나와 내 아이들, 우리 가족은 그가 있어 안전했고 안심했다.
"나가 뭘 그츠륵 잘못해시니?" 오빠는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나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오빠의 통곡을 뒤로하고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요? 왜 나에게 묻나요? 스스로가 정말로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폭력으로 사람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윽박지르고 권력의 칼을 휘둘렀는지를 정말 모르시나요?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면서 상대가 자기 뜻을 따르지 않을 때 폭력적으로 욕하고 내던지고 그런 폭력들을 행하고서도 자기의 폭력을 모른다고요? 이젠 알아차리셔야지요.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자기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타인들이 왜 모두 피하고, 떠나가는지. 사람 위에 군림해서 사람을 부리려 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그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태도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이제는 알아야지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잖아요?"
10년 뒤, 어느 가을날. 저녁 바람 선선한 강변 산책길에서,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어떵 살암시니(어떻게 살고 있니)? 아이들은? ..." 10여 년간 단절하고 있었던 오빠의 목소리. 나의 가족들 안부를 묻고 제주에 있는 가족들 소식을 전해주다가 오빠가 말했다. "그동안 미안하다. 뭐가 뭔지 모르게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이제 내가 아버지 돌아가신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아쉬운 게 많네. " 사나운 맹수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듯,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오빠는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그 오빠가 아니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오빠의 사과를 받으며 나는 덤덤하게,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기만 했다. 세월은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 오빠는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지만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오빠를 만날 수 있을까. 오빠를 만나 화해할 수 있을까. 이후에 나는 오빠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동안 제주의 많은 것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두기를 하면서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고, 그래서 덜 상처받고 덜 피해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 아버지 고향 제주와 작별하며 홀로 상실과 애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고 오빠에게 더 이상 원망이나 기대는 없어요. 다만 소망하고 바라는 것은 내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오빠가 행한 언행들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것, 상호 존중하며 서로의 개인적 삶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따로 또 함께 회복적 관계를 지향하는 것.
결혼 20년 아이들은 자라서 홀로서기해가고 있고, 그와 나는 결혼을 졸업했어요. 가족의 굴레에서 역할을 살아내느라 고되고 힘겨웠던 과거의 슬픔을 떠나보내고 역할로서의 존재가 아닌 개별적 존재로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우리 가족은 하나의 뿌리, 네 개의 가지로 뻗어나가는 나무처럼 LIving apart together! 하고 있어요. "
더 이상 오빠에게 내 삶을 침범당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오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다. 긴 세월 오빠에 대한 불안 공포 두려움으로부터, 가족의 굴레에서 통제받고 속박당하는 느낌으로부터 이제 벗어난다.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단락은 또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질지 아직은 모르지만. 굳이 오빠를 찾아가 만나고 싶진 않다. 이제 더 이상 오빠를 피하고 싶지도 않다. 조금은 가벼워진 듯, 홀가분하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알았다. 내가 바라고 기다린 것은 외롭고 힘겨울 때 등 뒤에서 안아주며 "괜찮아,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해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 언제나 내 편, 따뜻한 엄마였다는 것을. 입시 스트레스로 고된 시간을 버티며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울며 쓰러지는 딸을 등뒤에서 보듬어 껴안고 "아직도 늦지 않았어" 말해주면서 알았다. 이제 어른이 되어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내가 나에게, 아이들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남편으로 든든한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던 그를 보내고 홀로서기하면서 마음 속 주문을 외운다.
"내가 간절히 추구하는 삶은 든든한 지지자가 되는 거야. 외로운 시간을 잘 견뎌낸 상처입은 어린 나에게 이제는 내가 나의 든든한 보호자가되어주면 돼.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처럼 아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 네가 있어 든든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행복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