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 거대 폭력을 만났다. 미사 때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를 읊조리며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평화의 기도를 하는 성전에서는 평화만이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톨릭이란 평화의 신앙이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은 큰 위로이자 선물이었다. 그런데, 평화만을 기대했던 성전에서조차 폭력을 만나야만 하다니! 거대 폭력의 횡포에 어찌할 수 없는 좌절하고 무기력한 나를 대면해야 하다니! 아아, 삶은 왜 이다지도 슬프고 가혹한가.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참 교육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컸었던 연구소에서조차 실망하고 좌절하고, 국장과의 갈등으로 신뢰를 잃고 나서 동료들에게까지 은근 따돌림을 받으며,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과감히 사직하고 나와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수십 통의 이력서와 면접을 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앞날은 막막했다. 아무 데도 속하지 않고 허공을 떠도는 듯한 처지가 비참하고 가련했다. 외로웠다. 나 홀로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 심정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는 외로운 낮과 밤을 보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서 홀로 있는 시간은 생애 처음으로 얻은 쉼과 여유, 치유와 회복이기도 했지만, 맘껏 기쁘게 누릴 수만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아이들과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에 받은 제안이었다. 성당 주일학교 봉사는 이별 뒤의 축복과도 같은 신선한 만남이었다.
성당 신부님은 젊고 열정적이고 과감한 분이셨다. 조용한 시골 성당에서 많은 일들을 벌이고 싶어 하셨다. 이전 성당에서 쫓겨났다는 풍문도 있었고, 신부님의 성품에 대해 신자들은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이 많았다. 나는 감히 신부님에 대해 어떤 평가의 말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신자들의 헌담에 그저 침묵했다. 신부님은 굼뜨고 반응이 거의 없는 신자들에게 호통치고 혼내고 성전에서조차 욕설과 거침없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그 비난의 삿대질을 고개 숙인 채 다 받아내며 신자들과 함께 나는 모멸감을 참아냈다.
어른들에게 하는 욕설 비난 훈계는 참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말과 행실이 그러함에도 신부님은 열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 할 수도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랑과 폭력이 함께 존재할 때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른인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잘해줄 때는 정 많고 소탈하고 격이 없이 친근한 분이었다가 돌변하여 공격적인 언행을 할 때는 무서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은 이중인격자라 할 수 있었다. 10명 남짓한 주일학교 아이들 생일을 한 명 한 명 다 기억하여 챙겨주시고 주일학교 회식에다 다양한 체험학습이며 성지순례까지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그 열정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으나 그 열정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폭력적인 언행이 있었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다가 기대와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침없이 막말을 해대는 언행의 불일치, 그것은 이중 구속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하라고 했다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따위로 할 거면 당장 때려치우라고 소리를 지르고, 지시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제안이라도 할라치면 "건방지게시리" 말대꾸한다고 비난하고 지적하고 분노 폭발하여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때면 나는 끔찍이도 싫어했던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할 수 없는 혈연관계, 가족의 울타리에서 오빠를 피해 도망치듯 성당으로 왔는데, 여기에서까지 오빠의 이미지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 앞에 서면 나는 작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얼어붙고 무서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안고서 불안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주일학교에서 폭탄이 터졌다. 여름 신앙 학교 도보 성지순례에서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더니 엎드려 뻐처를 시키고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내리치는 체벌이 가해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교사들도 얼어붙은 채로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뒤에서 뒤따라가던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벌이 끝난 후였다. 그날 밤에 신부님은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훈육으로 장황한 연설을 하고 웃으며 화해한 듯이 행동하였지만 나는 그 행동을 증오했다.
신앙 학교에서 돌아와 아이가 체벌받는 그 현장에서 아이를 보호해주지 못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원로 신부님께 고해하고서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랜 시간 악몽에 시달리며 성당 나가기를 꺼리면서 신부님을 피해 다녔고, 이후에 그 아이는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해, 영성체 교리 중에 또 하나의 폭탄이 터졌다. 열 살 여자 아이의 빰을 때린 것이다.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그 상황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부모 이혼으로 엄마가 떠나간 후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의 행동이 버르장머리 없다고 훈계하며 하신 행동이지만 그것 또한 폭력이었다. 아이를 데리러 온 할머니에게는 아이 교육 똑바로 시키라며 호통을 치셨다고 했다. 할머니와 그 아이 상담을 하는 동안 미어지는 가슴 부여잡고 소리 없는 통곡의 눈물로 밤을 보냈다. 당시 나는 아동보호 전문기관에서 학대피해아동 놀이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학대 신고의무자로서 분명코 아동학대 행위인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매일 밤 기도하며 하느님께 물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거룩한 성당에서 반복되는 거대 폭력의 등 뒤에 숨어 나는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치료사로서, 아이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폭력의 방관자로서 느껴야만 하는 죄책감과 무력감, 어찌할 수 없음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나를 끌어내렸다.
그때 그 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암담하고 가슴이 무겁다. 문득 그 아이들이 보고 싶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내가 그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폭력으로부터 그 아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분노, 저항하고 싶은,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은, 아동학대로 신고하고 처벌하고 싶은, 아프게 한 만큼 상대에게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은, 거대 폭력을 낱낱이 파헤쳐 무너뜨리고 싶은, 그러면서도 무서웠다. 두려웠다. 신부님 앞에 서기만 하면 벌벌 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입이 얼어붙고 목이 말라버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고하려고 교구청 주교님 방으로 전화했었다.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리고자 전화를 걸기까지는 했지만 전화연결은 되지 않았다. 두 번 전화해보고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하고 또 하고 전화 연결이 될 때까지 전화를 하고 교구청에 알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당시 고해성사도 했고, 아픔과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못다 한 것이 있다. 5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내 몸과 기억에 새겨진 폭력의 역사를 돌아본다. 피해자로서, 가해자로서, 방관자로서, 내 생애 폭력의 역사는 어떠한가. 아직 못다 한 말을 가슴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