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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가는 튜브 Mar 19. 2024

첫 회사 퇴사 일기

내가 원하는 '직업'은 무엇인가?

고등학생 1학년 때였나. 10년 뒤의 나를 상상해 보며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자유롭게 써보는 시간이 있었다. 쓰는 수업이었으니 국어 아니면 작문 수업이었었겠지. 17세의 내가 생각한 나의 27살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또각거리는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서류를 들고 다니는 커리어우먼이었던 것 같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감명 깊게 본 여고생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앤 해서웨이의 모습. 어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상관없이 커피와 잘 차려입은 정장과 힐로 완성되는 커리어우먼의 모습. 아마도 선생님은 내가 어느 대학을 가서 무슨 전공을 선택하고 어떤 회사에 들어갔을지를 써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앤 해서웨이의 모습만 남았나 보다.


10년 동안 한 번의 재수와 4년 장학금, 성적 우수 졸업, 대학원 석사학위까지 마친 나는 27세가 되었을 때는 힐 신고 옷 잘 입은 커리어우먼은커녕, 박사학위를 포기한 취준생 신분으로 일 년을 보냈다. 연구원을 가고 싶었지만 지원한 곳은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사기업으로 눈을 돌리니 대부분 서류탈락. 그렇게 강남 해커스공화국을 제2의 대학교 삼아 아침에는 토익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커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준생활을 하고, 나는 다음 해에 사람들이 들으면 그래도 "거기 취업했으면 그래도 잘릴 걱정은 없어서 좋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 


공학을 전공한 나는 내 전공과는 전혀 무관하게 동향 분석, 홍보, 출판물 발간, 전략기획, 대관업무 등 정말 잡다한 일을 많이도 맡았다. 일 년이 지났다고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름 일에 대한 센스는 있는 편이었는지 그래도 맡은 일에 대한 성과는 좋은 편이었다. 같은 팀의 사람도 타 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보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취업하고서도 내가 언제든지 앤 해서웨이처럼 생각할 수 있는 롤모델을 계속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3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그래도 명함이 무기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네트워크를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대학원을 또 진학하고 말았다. 


공학대학원이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좁은 우물에서 살고 있었는지 일깨워주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나름 회사에서 "이것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프로세스는 개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하는 패기 있는 (신입) 사원이었는데,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실제로 그걸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 우물 안 개구리는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우리 회사는 아무리 제안해도 고쳐지지 않아요! 고인 물들밖에 없어!"라고 선언하면서 팀장에게 퇴사를 통보한다. 나는 항상 나라와 국민, 기업이 혁신을 해야 한다고 제일 앞장서서 혁신을 외치는 곳이 제일 혁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퇴사한 지금까지도 유효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패기 있게 퇴사를 했다.


그땐 정말 이 회사 밖에서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가 얼만큼인데, 내가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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