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산책코스
은비마차(Car)를 들인 후로 일상의 산책 반경이 더 넓어지고 다채로워지긴 했지만, 약 3년간 꾸준히 매 주말 걷는 주력 산책 코스는 변하지 않았다.
방배동에는 언덕도 많고 얕은 산에 위치한 공원도 다양하다. 길 건너 언덕을 오르면 서리풀 공원이 있고, 집 뒤쪽 언덕으로 오르면 도구머리 공원이, 북쪽으로 좀 더 걸으면 우면산도 있다. 은비가 집에 온 2018년 12월부터 약 1년 간 여러 언덕을 오르며 주변 길을 경험한 후, 그중 진입하는 길이 한적하고 넓어 사고의 위험이 적고 비교적 언덕의 기울기가 완만하여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 않으며 돌아 내려오는 길에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서리풀 공원이 우리 방배 산책 클럽의 주 목적지가 되었다.
주중에는 주로 은비와 둘이서만 걷곤 하지만, 주말 산책 클럽은 사람 둘 개 둘로 조직되어 있다. 올해 만 14세인 말티즈 계열의 John과 그의 동거인 누나가 주말 멤버로 은비와 함께 발맞춰 걷는다.
존 누나와는 20대 초반에 만나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고 있는데, John은 그때부터 봐 왔기에 알고 지낸 햇수로 치면 10년이 넘지만 아직도 정체 파악이 어려운 작고 흰 강아지다. 몸무게는 2킬로가 채 안되어 8킬로에 육박하는 은비를 끙끙대며 안다가 가끔 들면 마치 봉제인형을 들었나 느껴질 정도로 적은 무게로 세상을 표류하는 녀석이지만, 자기만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고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 사람이 가자고 하는 방향으로 잘 따라오고 말귀도 제법 이해하는 은비와는 달리 앞뒤 좌우 제멋대로 우당탕탕 걷곤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듯이 그 무게가 마치 깃털 같고, 사람에겐 충성하지 않지만 은비 동생에겐 관심이 많아서 나와 은비가 앞장서 걸으며 은비를 미끼 삼으면 제법 잘 따라온다.
서리풀 공원은 원래 산길로 이어져 있어 공원인지 뒷산인지 헷갈리는 언덕이었다. 경사진 흙길을 걸어 오를 땐 앞서가는 은비만 힘이 넘치고 사람 둘과 John은 녹초가 되기 일쑤였고 특히나 John의 얇디얇은 털은 포장도로를 걸어도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를 흡착하는 기능이 뛰어나 하얬던 강아지가 흙과 낙엽 투성이 되었다. 그런데 서리풀 터널이 개발되면서 무장애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넓은 하늘을 마주하며 걸을 수 있는 포장도로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이라 등산왕 은비가 요구하는 운동량도 적당히 확보되면서 훨씬 쾌적한 산책이 가능해졌다.
방배역과 내방역 사이 주택가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입구로 오르다 보면 서초대로와 한강이 보이는 정상이 나온다. 잠깐 물 마시고 이어진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계단이 있어 하산은 어렵지 않다.) 나오는 태양커피 바깥 자리에 앉아서 라떼 한 잔 마시고 평지 따라 집으로 돌아가면 딱 한 시간 반 코스가 완성된다.
새로운 장소를 산책하는 건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매일 하는 동네 산책과 정기적인 같은 루트 산책도 꽤 소중하다.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산책이 의무가 되기 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 외에 일상의 산책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 버스 두 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는 날씨가 좋거나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 종종 걷긴 했지만,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과 강아지와 산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평소 같았으면 돌아가는 길이라 잘 가지 않는 골목길로 가보기도 하고, 킁킁대며 냄새 맡는 걸 기다리며 주위를 살피다 보면 지도 어플엔 보이지 않는 작고 오래된 가게를 발견하기도 한다. 집들이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동네에 특이한 건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리모델링 공사가 많은 동네 특성상 오래된 주택이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는걸 실시간으로 목격하기도 한다. 거의 공인중개사 수준으로 동네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또 같은 공원을 정기적으로 오르다 보면 평소에 집에서 회사로 식당으로 건물에서 건물로만 이동할 때는 놓치기 쉬운 계절의 변화를 촘촘하게 느끼게 된다. 지금같이 꽃이 피는 계절에도 굳이 시간 내어 꽃구경하러 나서지 않아도 나무에 새순이 생기고 꽃봉오리가 생겼다가 만개하는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온 산이 초록색으로 뒤덮였다가 또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다. 여전히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생각하면서 벌써 또 일 년이 지났지 하지만, 이제는 매일 걷는 발걸음과 사진첩에 남은 일 년이란 계절과 강아지들의 모습을 보면 또 납득이 간다. 아마도 못 고쳐 쓸 게으름뱅이였기 때문에 이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긴 하겠지만, 매일의 산책은 출근길이나 등굣길을 걸으면서는 느낄 수 없는 작은 위안과 뿌듯함이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