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동안의 육아

빠지지 않는 뱃살

by swimmming


엄마는 딸 셋을 낳았다. 흘러내리는 엄마의 배를 보며 우적우적 입에 무언가를 쑤셔놓고 있는 엄마에게 배 좀 봐 출렁출렁 거려 하고 놀려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게 다 니들을 낳은 흔적이다 라고 맞받아쳤다. 90년대를 두루 거쳐 엄마는 딸딸딸을 삼연타로 낳았다. 그즈음이 남아선호 사상의 끝물이라지만 내심 아들이 없다는 게 신경 쓰일 법도 한데 되려 엄마는 딸이 셋이라 참 좋다!말하곤 했다.


막내와는 제법 나이 차이가 나는 편이라 엄마가 막내동생 생겼다고 말해준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주말 나는 간만에 라면을 끓여먹는다고 신나 있었고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의자를 끌어당겨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보글보글 물을 끓이고 있었다. 같이 놀 수 있는 동생이 생기기를 한창 노래부를 나이였다. 엄마가 배를 만지며 우리 가족에게 선물이 생겼다고 했고, 이후 라면을 먹는 내내 동생이 생겼다고 아주 들떠있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난다.


막내의 소식에 유독 신난 이유는 둘째가 있긴 했지만 여느 자매들처럼 함께 놀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지체장애 1급으로 태어났다. 아빠와 엄마는 거의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외할머니가 훗날 말씀하시기로는 엄마가 한참을, 아주 한참을 울며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아주 어렸지만 둘째 동생이 부모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걸 알아챘던 것 같다. 둘째의 존재는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 가족 전체가 어떤 방향을 잡을 때 가장 최우선 고려사항이 됐다.


동생은 사실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지금은 그마저도 못하지만 기어 다니는 게 제일 좋은 상태였다. 입으로 들어가는 건 물 한 모금도 떠먹여야 하고, 모든 시간에 기저귀를 차야한다. 의사표현은 웃는 것과 우는 것 정도가 전부. 아무리 커도 생후 8개월 정도의 상황에서 더 이상 발전은 없는 발달상태였고 엄마와 아빠는 그러한 딸을 내내 아기처럼 키웠다.


엄마는 아파서 끙끙 앓다가도 동생이 밥 먹을 시간에는 다가와 밥을 먹였다. 틈날 때마다 잊지 않고 물을 챙겨 먹였고 세네 시간 간격으로는 기저귀를 갈았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할 때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밀린 집안일에 더해 불편한 딸을 살폈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개인적인 시간' 이란 없었다. 자다가도 동생이 울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일어나 동생을 봐줘야 했다. 이러한 육아의 무게를 28년 동안, 쉼 없이 견뎠다.


아주 매우 드물게 일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외박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루는 동생이 밤중에 큰 볼일을 봐서 혼자 낑낑대며 다 치웠는데 한참 정리하고 돌아보니 다시 볼일을 한가득 봤길래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기 같지만 몸은 아기가 아니기에 어린 내게는 꽤나 벅찼다. 하룻밤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동생의 평생을 그리한 부모님은 오죽했을까. 당시엔 내가 힘든 것만 크게 보여 그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었다.


종종 이런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런 동생을 둔 것 치고 나나 막내는 둘째 동생 때문에 얽매이는게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알게 모르게 양보하는 건 있었지만 동생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하진 않았다. 그래서 일반적이고 평범한 가정보다 못해본 게 많을지라도 그다지 불편하다 여기지 않고 살았다. 엄마를 돌보는 지금에서야, 그동안 부모님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모두 쏟아 다른 자식들에게 여파가 퍼지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집에선 숙소처럼 잠만 자고 내리 밖을 돌아다니던 내가 회사와 집만 오가며 집안일에 치이고 엄마를 돌본 지 일 년가량이 지나자 점점 뱃살이 늘어났다. 반면 엄마는 가면 갈수록 뱃살이 들어갔다. 거칠던 손은 섬섬옥수가 되어간다. 환자가 있는 집은 집안일이 배로 많기에 집안에서 아무리 바쁘게 총총 돌아다녀도 신기하리만치 살이 빠지지 않더라. 운동할 시간조차 없다던 엄마의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버틴다는 건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