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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5. 2023

애틋한 기억

당신이 오늘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쨍그랑. 또 깨뜨렸구나. 습관처럼 안방 베란다 바닥에 널브러진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주웠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무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20년 전 유채꽃 흐드러진 캠퍼스 정문 앞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얼굴로. 들썩이는 입꼬리 밑에 살짝 패인 그녀의 보조개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한 움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은 뒤 아내를 번쩍 들어 거실 소파로 옮긴 뒤 깨진 접시 조각을 치웠다. 아내는 달그락 소리가 흥겨웠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봤다. 오후 3시. 2시간 뒤엔 전문 요양사가 온다. 요양사가 오기 1시간 전엔 안정제를 먹여야 한다. 혼자 중얼거리며 아내를 쳐다봤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고양이 걸음으로 안방에 들어왔다. 다시 베란다로 향해 청소 도구를 정돈할 찰나에 수북이 쌓인 A4 용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장 집으니 뿌연 먼지가 풀풀 날렸다. 맨 위 종이에 적힌 ‘2006년 4월 시나리오 초고’. 잊고 지냈던 아내의 시나리오였다.


영문학도였던 아내는 영화 감독을 꿈꿨다. 같이 서로의 미래를 그려볼 때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었다. 대학교 1학년 영문학 입문 수업에서 배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격렬하고 잔인한 사랑과 운명을 그려내고 싶다고. 그럴 때마다 난 그 작품이 왜 그렇게 좋냐 물었다. 그럼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이거 영어 원제가 Withering Heights인데, withering이 ‘시들어 가는’이라는 뜻이거든? 시든 게 아니라 시들어 가는 거야.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두 남녀의 사랑이 시든 걸 보는 게 아니라 시들어 가는 걸 보는 거라고.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오물처럼 악취를 풍기고, 막연한 체념이 온몸의 수분을 빨아가는 걸 생생하게 보는 거야. 난 이 소설 제목이 현재진행형이라 더 저릿하게 다가와.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결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힘들어. 안 그래?”


아내는 나중에 영화를 만들고 외국에 출품하면 제목에 반드시 현재진행형을 쓸 거라 했었다. 아내가 시나리오에 쓰는 장면들도 그랬다. 무언가를 하다가 서서히 암전이 되듯 주인공들은 절대 하던 걸 멈추지 않았다. 지난 날을 곱씹으며 첫 장을 넘기니 두 번째 종이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창작자는 한 세계를 열어놓을 뿐, 그 세계의 움직임을 관장해선 안 된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서리가 노랗게 바랜 종이들을 번쩍 들어 방 안으로 옮겼다. 군데군데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시나리오별로 모은 뒤 스테이플러로 정리했다. 정리를 마치니 30여 편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거실에 누운 아내를 바라봤다. 살짝 벌어진 채 메마른 입술. 헝클어진 머리. 목 늘어난 티셔츠. 양념 묻은 손. 아내가 꿈꾸던 미래에 이런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메는 목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햇살이 물러가는지 발에 달라붙은 그림자가 짧아지고 있었다.

 

5시가 되자 요양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공손히 남긴 뒤 밖으로 나왔다. 매서운 바람이 머리칼을 할퀴고 지나갔다. 겨울이 다가오는 탓인지 공원 근처엔 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벤치에 앉아 에코백을 뒤적였다. 그리곤 앞서 정리했던 아내의 시나리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제: 애틋한 기억(Moving Memory)

 

한 장씩 넘기며 아내가 말하고 싶었던 애틋한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상상했다. 흐려지면 그새 잊힐세라 다시 선명해지는 기억.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의 당신은 나와의 기억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 쨍그랑. 깨진 접시를 주워담는 내 얼굴은 기억할까. 달그락 소리에 어깨를 들썩였던 그 순간은 기억할까. 나는 뭐라도 좋으니 아내가 딱 한 가닥의 오늘만이라도 붙잡아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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