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집에서 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역설이란 송곳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
무릎을 탁 치게 되는 후렴구다. 50여 년 전 풍경이 2023년 한국에 모난 데 없이 겹쳐보이는 이유는 뭘까. 여전히 세상은 복잡하고 아리송한 채 무수한 풍선들만 뜨고 지고를 반복하기 때문일까. 김광석의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김민기, 한대수 등과 함께 1970년대 포크 음악의 상징이었던 양병집의 노래다.
해학과 풍자로 가득한 노래로 유신 시대의 폐부를 찔러댔던 그는 그야말로 저항 음악의 상징이었다. 막무가내식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메시지는 온갖 은유와 역설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통념에서 벗어난, 혹은 청개구리마냥 상식과 반대로 흘러가는 세상사를 오밀조밀한 일상 속 풍경에 빗대다니. 숱한 역설의 단어들 안에 얼마나 많은 절망을 담아내야 했을지, 그 노고가 쉬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푹푹 찌는 더위를 이고 거친 광야를 향해 가겠노라 선언하며 시대의 이정표처럼 다가오는 <아침이슬>과 달리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동화처럼 그려진 풍속화를 앞세워 고요한 정적 속에서 한 치 앞이 암연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느낌이다.
대비를 통해 부각되는 가사들은 70년대 통념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시대의 얼굴'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본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존재.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존재.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존재. 정상 궤도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뒤죽박죽인 모습이 그 시대를 한 폭의 데칼코마니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양병집의 대답은 '숨'이란 단어로 축약된다. 사냥꾼에게 잡힌 먹잇감이 체념한 듯 내쉬는 한숨에선 간주 파트에 몰아쉴 숨을 끌어다 내뱉고 싶은 양병집의 갈망이 느껴진다. 먹잇감의 끝은 죽음이듯 먹잇감의 한숨은 유언이다. 시대에 짓눌린 육신이 토해내는 유언 말이다. 그 유언을 대신할 외마디 한숨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어쩌면 한숨 하나론 모자라니 마지막엔 긴 혀라도 두 번씩 내두른 게 아닐까. 이 노래는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지금 이 노래에 3절과 4절을 붙인다면 어떤 내용이 담길까. 곰곰이 상상해봤다. 그 시절처럼 서슬퍼런 칼날은 없더라도 이 시대도 보이지 않는 역설에 묶인 채 굴러가고 있을 텐데. 무엇이 됐든 원래 가사보다 시답잖은 이야기만 적히지 않길 바라야 하나. 아니다. 시답잖다는 말은 취소한다. 시대의 정신과 아픔은 원래 상대적인 거니까.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 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나는 돗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만이 한숨을 내쉰다
남자처럼 머리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가방없이 학교가는 아이 비오는 날 신문 파는 애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
태공에게 잡혀온 참새만이 긴숨을 내쉰다
한여름에 털장갑 장수 한겨울에 수영복 장수
번개소리에 기절하는 남자 천둥소리에 하품하는 여자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있건만
독사에게 잡혀온 땅군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
독사에게 잡혀온 땅군만이 긴 혀를 내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