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될 수 없는 순간도 있다
지나온 시간에는 찌꺼기가 있다. 누구나 각자의 시간에서 경험을 섭취하고 교훈이라는 영양을 흡수한다. 그리고 남는 건 온갖 잡스러운 고통과 아픔. 모두 찌꺼기다.
배설하지 못한 찌꺼기에겐 추억과 트라우마라는 두 가지 이름이 붙는다. 전자는 굳이 배설하지 않아도 된다. 뭔가를 이뤄낸 삶의 거름이자 훈장이니 말이다. 후자는 배설해내야만 한다. 임계점 끄트머리에 가보지도 못한 삶을 어떻게든 옭아매는 존재다. 안타깝게도 그걸 배설할 권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실패가 켜켜이 쌓아올린 벽에 가로막힌 채 무수한 삶은 변화를 멈춘다. 변화가 사라진 삶은 아픔을 추억이라 부르지 못한다. 사실 그 아픔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 미화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아픔을 추억이라 부르는 삶의 전제는 성공이다.
기준은 제각각이지만 아무튼 성공이 필요하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아픔을 소화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함부로 채찍질을 한다. 연고도 없는 삶들을 끌어와 성공을 역설하고 모든 인과관계를 의지라는 개념으로 치환한다.
물론 성공에 있어서 의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의지는 절대불변의 상수가 아니다. 의지로 실력을 쌓아도 실패일로에 놓이는 게 일상다반사다. 숱한 격랑에 바위가 깎이듯 거듭되는 실패 앞에선 의지도 깎이기 마련이다.
십중팔구는 타협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포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타협 뒤에 남는 건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책이다. 성장을 했더라도 실패한 자는 자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 실패를 거름으로 삼지 못하고 남탓만 하는 아둔한 자라는 오명에 목이 졸린다. 찌꺼기를 거름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는 그렇다.
찌꺼기를 찌꺼기라 부르는 순간 아픔은
치졸한 분노로 산화되어 흩뿌려진다.
냉정해지자. 세상은 거대한 제로섬 게임이다. 성공엔 총량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총량은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가 제시한 1대99의 비율만큼 작다. 1의 성공을 위해 99의 패배가 필요한 세상에서 주구장창 성공을 강조한 결과는 당연히도 참혹하다. 치열한 경쟁이 빚어낸 공고한 위계질서. 그 질서의 거대한 눈 아래 경시되는 삶들. 그리고 경시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성공의 문턱을 넘어 아픔을 추억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우리는 분노와 불만의 종말을 직면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지독한 상상마저 하게 된다.
아픔을 쓸모없는 찌꺼기라 부르면 안 될까. 하등 도움이 안 돼서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쓰레기라 부르면 안 될까. 그래서 아픔이 추억으로 변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까. 내 20대를 예로 들어보자. 단언컨대 내 20대는 참 개같았다. 최악의 10년이었고 앞으로도 평생 되새기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정신과 실력의 성장과는 무관한 나만의 감회다. 훗날 성공이 찾아온대도 이 시절을 추억할 마음은 없다.
행여 이 분노가 실패로 점철된 시절에 대한 치졸한 변명으로 읽힐까봐 오랜 시간 삭이고 또 삭였다. 지금 나는 그 결정을 조금은 후회한다. 너무 많은 걸 내 탓으로 돌렸다. 운조차 실력이라는 허망한 말로 나를 질책했다. 그리고 지금 겪는 아픔은 다 추억이 될 거라 다독였다.
서른 초입에서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의미 없는 시간은 너무 많았고 억울하게 새겨야 했던 아픔의 상흔 역시 많았다. 이것들은 결코 추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이 될 수 없는 찌꺼기는 한시바삐 비워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개같은 건 개같은 거라고 말하기로 했다. 실패로 말미암은 분노에 인색한 세상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세상 풍파에 고고한 척하지 않기로 했다. 더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더 이상 애먼 데서 교훈을 찾아 허적이며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소위 성공한 삶이라는 것들은 절대 거울이 될 수 없다.
거울엔 오직 나만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