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입니다. 귀하의 금월 수령금은 9/17~10/9까지 예정된 정부 합동 재원 마련 대책 조정기간으로 인해 다음 달에 이월 합산 지급될 예정입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에라이 씨. 창문을 여는 겸 소리를 냅다 질렀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위선의 탈을 벗는 것 같다. 죽고 사는 걸 걱정해야 하는 나이 탓일까. 아님 아침 9시부터 모질게 구는 세상에 사는 탓일까. 마뜩잖은 기분이 가시기도 전에 아래를 쳐다봤다. 새로 온 경비원이 인사를 건넨다. 경직된 입술을 억지로 올리며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럴 땐 2층에 사는 게 참 싫다. 누군가의 짜증을 모른 척 지나칠 순 없나. 아직 세상이 덜 퍽퍽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며칠 전 저 양반하고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이는 54살. 굴지의 대기업 전무 자리까지 꿰찼더랬다. 폭이 2m 남짓한 경비실에 앉아 있는 폼이 영 어색했다. 근처 시장에서 산 꽈배기 하나를 건네며 경비 일을 택한 연유를 물었다.
우리 나이엔 장단을 재는 게 사치죠. 아직 아들놈이 대학에 다닙니다. 뒷바라지는 해줘야죠. 아쉬운 소리 듣는 애비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제법 결연한 선언을 실어 나르는 입술은 바짝 말라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서 달그락거리며 돌아가던 작은 선풍기를 끄고 일어났다. 아파트 단지가 너무 커서 미화작업을 미리 해야 한단다. 분칠한 것 마냥 하얀 그의 손에 들린 마대자루가 유난히 칙칙하고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새 그의 손은 검게 그을려 마대자루와 꽤 잘 어우러진 듯했다. 그는 반쯤 접힌 소매를 내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대서다. 40도를 웃도는 더위가 일상이라 여름 절기는 가늠도 안 된다. 오죽 비가 안 내리니 장마가 그리울 지경이다. 사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무서워 잘 나가지도 않는다. 이내 더운 바람이 방충망 사이로 스며들었다. 재빨리 창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이제 뭘 할까. 한두 달쯤 고민해본 일상인데 아직도 어색하다. 언젠가 만났던 대학 선배는 은퇴를 담석이 가득 찬 쓸개를 빼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개운하지만 쓸개 빠진 놈은 소화 기능이 떨어져 맛난 걸 양껏 먹을 수 없어 무기력해진다나 뭐라나. 공허한 기분을 정의한다는 건 대단한 소득이다. 제 감정을 가늠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켰다. 회사였다면 점심에 즐겨먹던 선지해장국으로 덥힌 배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식혔을 텐데. 지나온 30여 년의 굴레는 참으로 지독하다. 공허한 이 시간을 버티는 게 고작 과거 회상이라니. 저 경비원처럼 땀이라도 흘리고 살갗이라도 그을려야 하지 않을까.
마침 틀어놓은 뉴스에는 40대 언저리로 보이는 두 전문가 패널이 초고령화 사회 타개책을 논하고 있다. 백세시대에 고령화지수가 무려 30%라며 격앙된 말 한 마디가 귓등을 때렸다. 원체 낙관적인 편은 아니지만 백세까지 떠밀려 살게 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득 주유소에서 일을 하는 친구 녀석이 생각났다. 최저임금보다 살짝 높게 받지만 허송세월 아껴서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더랬지.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받는다. 녀석은 손님이 많지 않아 받았다며 어지간히 반가운 티를 냈다. 30년 전 대학 다닐 때 자주 들렀던 칼국수 노포에 다시 가보자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고성이 들려왔다. 주유소 사장인 듯했다. 당황한 녀석이 미처 전화를 끄지 못했는지 낯부끄러운 핀잔이 적나라하게 전달됐다.
조용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티비 채널을 돌렸다. 영화 채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굽은 엄지손가락은 리모컨 채널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