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9호
이번 주의 생각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내 삶과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보통 이런 변화는 조금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데 요즘은 다르다. 아침에 듣는 음악, 읽고 있는 책, 자기 전에 쓰는 글, 보는 영화, 나누는 대화의 주제.. 내가 알아채지 못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에 푹 빠지며 조화롭지 않게 무언가를 시도하며 2020년을 보내고 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며 지금까지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왜 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구체성이 너무 높은 조건이 되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들로 인해 시도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면 완벽하지는 못할 지라도 일단 시작하자, 그리고 꾸준하게 하자.'라는 결심을 하며 몇 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그중 하나가 프랑스어 공부였다. 불어를 왜 공부하냐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다. 올해 초 토론토대학교에서 만난 프랑스인 친구? 프랑스 작가들의 책? 토론 문화?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나를 지키며 우리가 되는 사회? 때때로 내가 느낀 일은 굉장히 구체적인데 막상 말로 하려고 하면 그 의미가 옅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그냥, 배우고 싶었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이 언어를 공부하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이럴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Quelque chose.
직역하자면 '어떤 것, something'이라는 뜻이다. 보통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너무 강하게 느껴져 적절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말로 하지 않을 때 더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 그것이 '껠끄 쇼즈'이다. 구구절절 뱉는 말보다 누군가의 눈빛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번 주의 콘텐츠
Interview
Carla Bruni와의 인터뷰 중에서
Quelque chose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해요.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묘사하기 힘들 때죠. 왜냐하면 그게 가장 중요한 감정들이거든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설명할 수 없어요. 방치할 수도, 탈출할 수도, 컨트롤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죠. 사람이 진정으로 느끼지만 너무 강하게 느껴져 적절한 단어가 없을 때, 단어를 찾아봐도 나타나지 않을 때 그냥 감촉 같은 것만 나타내는 거예요.
Book
조르주 페렉 <사물들>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당시 그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살았기에,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의 가치관이 바뀌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외모뿐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것,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변해 버렸는지, 그들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었다면 진정 놀랐을 것이다.
Book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단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듯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두 자기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 좀머 아저씨는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뿐이고, 거기서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은 것 같았다.
언제나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도리상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거나, 차라리 이렇게 했더라면 더 나았을 거라든가.. 언제나 나는 뭔가를 해야 된다는 강요를 받았고, 지시를 받았으며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했다. 이것 해! 저것 해! 그것 하는 거 잊어버리면 안 돼! 이제 끝냈니? 저기는 갔다 왔니? 왜 이제야 오니? 항상 압박감과 조바심,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끝마쳐야 하는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만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여전히 쉬지도 않고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꿋꿋하게 거의 열정적으로 걸었고, 마침내는 앞으로 가로막는 물을 좀 더 빨리 헤쳐 나가기 위해서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양팔로 노를 저어가며 앞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