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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lee Mar 21. 2021

웰치스상자사건

봄 3호


이번 주의 생각


봄 냄새가 아스라이 느껴지는 아침이다. 창문을 열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빗소리에 뒤섞여 들리고 풀과 나뭇잎이 한껏 물을 머금어야 맡을 수 있는 상쾌하고 투명한 냄새가 진하게 다가온다. 어렸을 때부터 이 소리와 냄새가 좋았던 건지 아니면 장화를 신고 나갈 기회를 얻은 게 신이 났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다.


2008년 봄, 11살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이른 아침, 텐트 안에서 친구들과 곤히 자고 있는데 선생님이 다급하게 문을 열며 당장 일어나 짐을 챙기라고 하셨다. 밖을 내다보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우리 텐트가 금방이라도 그 빗물에 쓸려갈 것 같았다. 늘어놓았던 짐을 허둥지둥 챙기고 신발을 신는 나에게 선생님이 몇 개 없던 우산을 건넸다. 이미 젖어있던 나는 친구에게 우산을 줬고 선생님은 전날 마신 웰치스가 담겨있던 박스라도 머리에 쓰고 가라고 하셨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박스를 머리 위로 올리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제일 먼저 학교 정문을 빠져나왔다. 주말의 이른 아침, 늘 붐비던 하굣길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해방감이 들었다. 괜히 뒤를 한 번 쓱 보고는 박스를 내렸고 얼굴에 쏟아지는 비를 마음껏 즐겼다. 실내화 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농구장을 지났고 눈에 보이는 물웅덩이를 차례로 하나씩 풍덩 밟았다.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비가 떨어져 재미있는 소리가 나는 미끄럼틀에도 누워봤다. 그렇게 한참 걸려 집 근처에 도착했는데 그제야 엄마의 잔소리가 슬슬 걱정돼 젖은 머리카락을 꾹 눌러 물기를 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고 있던 엄마가 안방에서 놀라서 뛰어나왔다. 점심을 먹고 온다던 내가 너무 이른 아침에 쫄딱 젖어 나타난 것이다. 손에는 물이 뚝뚝 흐르는 박스 하나를 들고. 엄마는 왜 전화하지 않고 이 비를 다 맞고 왔냐며 수건으로 내 머리와 얼굴을 닦아줬다. 왠지 나는 나만의 비밀이 또 하나 생긴 것 같아 수건 속에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로부터 1 , 엄마와 도쿄로 여행을 갔다. 하루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순식간에 우리의 옷이  젖었고 신발에는 하루 종일 물이 고여있었다. 온몸이 축축한 상태로 우리는 이름 모를 사원에 가게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검은 돌멩이들이 끝없이 깔려있었고  옆으로 진한 초록빛의 가로수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원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길에서 나던 진한 초록 냄새, 걸어 들어갈수록 진하게 풍기던  냄새, 그리고  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걷던 엄마의 모습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아무렴 어때!’ 외치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조금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나는 비가 조금  좋아졌다. 그날 저녁 우리는 롯폰기에 있는  돈까스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엄마는 축축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앉아서는 훗날 도쿄를 떠올리면 오늘이 생각날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웰치스 상자사건> 엄마에게  털어놓아도 상관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의 콘텐츠


Book

토베 얀손 <두 손 가벼운 여행>   

“그냥 아틀리에를 기억해 본 거야. 여기선 정말 행복했는데. 생각해 봐. 젊은 시절의 칠 년이라니. 반다 언니, 사람이 젊은 건 몇 년 동안일까? 반다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너는 너무 오랫동안 젊게 지냈지. 눈에 별을 담고. 우리는 너의 별눈이라고 불렀어. 예쁜 별명이지? 넌 너무 순진해서 남이 하는 말은 다 믿었어. 뭐든지 다.”
거기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 얼굴에 갑자기 호감이 갔다. 어쩌면 나는 흘러간 시간이 만들어 준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시간을 지금까지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Book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절대로 뒤에 오는 말들이 얼마나 쉬이 변하는지, 변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 나는 ‘절대로’ 뒤에 어떤 말도, 어떤 마음도 함부로 세우지 못한다.
왜 아무도 어린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 따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어른의 잣대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걸까?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미간을 펴고 미소를 짓지 못할까? 왜 한결같이 지친 표정으로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 액정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뭐든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하다가 잘하게 되고, 어른들은 ‘잘’ 하려다 그냥 하게 된다. 아이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냥’ 해야겠다. 생각 없이 그냥 하다가 잘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클 테니까. 계속할 것이다. 일주일에 3번 발레 교습소에 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오전에는 발레를 배우고 오후에는 공책을 펼쳐 시를 쓰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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