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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디얼리스트 May 28. 2024

어느 날의 복싱 일기

직장인들의 체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뚱뚱하고 배 나온 사람과 마르고 배 나온 사람


이게 너무 단순한 분류라면 이렇게 다시 구분할 수 있겠네요.

안경 쓰고 배 나온 사람과 안경 안 쓰고 배 나온 사람


저도 어느새 배가 많이 나왔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체력도 약한 데다 몸까지 무거워지고 보니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대부분을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운동이란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예전부터 타격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뭔가를 때린다는 데서 오는 쾌감 때문이었죠.


물론 고수가 되기 전까지 맞는 것은 주로 제 쪽이라는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예전에는 검도를 잠깐 했었는데

초등학생에게-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대회까지 나갔었던-죽도로 호되게 맞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온 후에는

근처에 검도장이 없어 종목을 바꿔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역시 타격기는 복싱이지' 하는 생각에 동네 복싱 체육관을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복싱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내적 갈등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선 체육관까지 가는 일부터 만만치는 않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나면, 몸이 한층 무거워지기 때문이죠.

여러모로 심신이 피곤한 날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체육관 앞에 도착하면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에서부터 느껴지는 특유의 공기가 저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매스 복싱이란 걸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스파링의 가벼운 버전으로

특정 기술을 익히기 위한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잠자고 있는 타격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는 개뿔 긴장과 공포의 연속입니다.


오늘도 혼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관장님이 이야기합니다.

"이따가 이 친구랑 같이 올라가실게요."

(올라간다는 곳은 링 위를 의미합니다)


오랜만에 와서 컨디션이 별로라 조용히 있다 가려고 했지만...

맞습니다. 실전 경험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겠죠.


가볍게 몸을 풀면서 저와 붙기로 한 친구가

샌드백을 치는 모습을 곁눈질로 슬며시 관찰해봅니다.


아아... 역시 너무 세 보이네요.


물론 20대가 대부분인 이 체육관에서

30대 후반인 저보다 약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저 펀치에 맞으면 꽤나 아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꼭 지라는 법은 없죠.

여유를 갖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싸운다면 어쩌면...


헛된 기대였다는 건 시작한 지 5초도 안 돼 알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관장님은 저 친구에게 왼손만 쓰고, 걸어 다니라고 주문했는데

재빠른 스텝에다 오른손 훅까지 맞으니 약속 위반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 따위를 할 정신은 없습니다.

덜 맞으려면 더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다가 맞는 것보다는 돌격하다 맞는 편이 낫겠죠.


자꾸만 내려가는 가드를 올리면서 시선이라도 상대에게 고정하려 해 보지만,

맞을 때마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헤드기어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1라운드가 끝났습니다.

링 위에서의 3분이란 정말이지 긴 시간입니다.

전 이미 지쳤습니다.


30초간 휴식, 그리고 다시 시작.

2라운드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도 때리고 싶어 허우적대며 주먹을 날렸던 것,

체력이 바닥나 후반에는 발이 질질 끌렸던 것,

그리고 라운드 내내 계속해서 많이 맞았다는 것 정도 외에는.


매스 복싱이 끝나고, 저는 숨쉬기도 힘든 반면

이 친구는 자기가 너무 세게 한 건 아닌지 미안함을 표시합니다.

역시 운동하는 친구는 예의도 바르네요.

안타깝게도 저는 길게 대답할 여력이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저는 복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재능도 없는 것 같고요.


그저 나중에 배 나온 아저씨가 되지 않기 위해

일종의 오기로 이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관장님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맞더라도 눈빛만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면 눈빛으로라도 보완해야겠지요.

언젠가는 눈빛만으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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