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에 들어가다

by 고도리작가

2011. 8월 당시 부서장에게 사직을 언급한 후 3개월이 지난 그 해 11월 나는 휴직에 들어간다.

휴직한 직후 가슴 벅찬 기분으로 거닐었던 우리 마을의 가을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도처에 널린 평범하디 평범한 좁은 길. 바람에 쏟아지던 노란 은행잎. 허공에서 이파리끼리 서로 스치듯 부딪치는 소리. 땅에 떨어져 스치는 소리. 아직도 생생한 소리들


휴직한 그 성과평가에 B 등급을 줄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는 과장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해 눈 돌아가게 바빴던 나는 2개월을 남기고 휴직에 들어갔고 남아 있는, 매일 보는 직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을 해야 했기에 그 간 고생한 건 알지만 낮은 등급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달라고 직접 전화까지 주셨다.

휴식의 단꿈에 빠져있던 나는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과장님을 안심시키고 내 공무원 기록에 유일한 B 등급을 남긴다. 나도 참 순진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사람좋은 소릴 하다니... 그 B등급때문에 나는 근평 관리에 실패하고 결국 승진에서 후배들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여간 나는 휴직을 하고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둘째가 생긴다.

그렇게 내 오랜 휴직이 시작된다.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다 힘들다 행복하다 힘들다 했고 둘째가 기저귀를 떼고, 이유식을 끊고, 말을 하고,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조금씩 여유로워졌다.


휴직 직후 나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지금은 많이들 쓰는 단어지만 당시만 해도 꿈과 관련된 책을 읽고서야 '버킷리스트'라는 용어를 접했고 대략 20개에 달하는 리스트를 작성했다.

달성 시기를 1년 이내, 3년 이내, 5년 이내, 10년 이내로 나누어 꽤나 현실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성했다.

예를 들면 (1년 이내) 벨리댄스 배우기, 요가 다시 시작하기 (3년 이내) 머슬 마니아 출전하기 (10년 이내) 출간하기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 둘째가 생겼고 버킷리스트의 벨리댄스와 요가를 지우는 것을 시작으로 나의 버킷리스트는 수첩 속에 고이 잠들게 된다.


공무원 신분을 유지한 채 휴식기간을 갖는 것은 양 손의 떡을 쥐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므로 양 손에 두 개의 떡을 최대한 오랫동안 쥐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휴직기간에 한번 시도해 보라고들 했지만 양 손의 떡을 쥐고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다른 하나에 대한 절실함도 없고 삶에 몰입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 버킷리스트는 고작 취미생활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휴직기간 동안 공무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시도할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나는 내 신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솔직히 한편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나도 일이 있다고.

일과 휴식이라는 떡을 양 손에 쥐고 지금 상황이 평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마음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긴 전업주부의 생활로 나는 내가 공무원인지 아닌지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6개월에 한 번씩 부처에서 휴직자 실태점검을 하거나, 연말 소득공제신고를 하는 등

내가 어디 소속인지를 상기할 때마다 사직이냐 아니냐 결정에 대한 조급증이 더해갔다.


언젠가 우리 마을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의가 있어 아침부터 쪼르르 쫒아 가보았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손을 들고 지금 내 심리상태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결국 사표를 쓸까요? 말까요? 질문했다가 혼만 났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된다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고"

나는 여전히 갈팡질팡 하고 있었던 거다.


갈팡질팡한 와중에도 나는 '사직'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방증들을 찾아다닌다.

가령, 최근 직장을 그만둔 또래 엄마들을 집중 탐구한다.

관찰하고 대화하면서 사표 써도 행복하게 잘들 산다고 결론 내린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아예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한편으론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포착한다.

엄마들이 "둘째도 꽤 컸는데 뭐라도 다시 해 볼 생각 없냐?"라고 묻기라도 하면

살짝 말해준다. "지금 휴직 상태라고. 공무원이라도"

부처 이름까지 나오면 꽤나 폼 난다.

영락없는 동네 아줌마 꼴로 돌아다니다가도 혹시 엄마들이 물어볼 때면 꼭 그렇게 대답한다.

마음속에 내재한 적나라한 속물근성을 느낀다.

들고 있자니 무거운데 놓치자니 아까운 떡 한 덩이 들고 있는 꼴이다.




그래도 여지없이 시간은 흐른다.

점점 결정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젠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을 한다.


복직을 한 달 남긴 시점, 나는 드디어 결정한다. 인사과에 전화를 해야 하나? 전화오기를 기다릴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결심했을 때 말하지 않으면 결국 못할 것 같았다.


'저 그만하려고요’


나는 그만두는 쪽을 택한다. 왠지 멋지다.

회사의 반응은? 뭐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라는 반응이다.

하긴, 그렇게 오랫동안 휴직을 하면 복귀할 마음이 없다고들 생각한다.

확실하게 사직하는 거냐고? 다그치듯 묻는다. 연말 인사가 있어서 확실하게 말해줘야 한다면서

상대가 그렇게 나오니 좀 쫄았나? 자신 없게 '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런데 뭐지? 이상하다.

뭔가 계속 찜찜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자신이 없다.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에 티끌만큼의 불순물도 있으면 안 되는데. 평온한 상태에서 결정해도 될까 말까 하는 판에 담당 직원이 막판에 그렇게 초를 치다니..


사직을 3주 남긴 시점

계속 찜찜하다.

알 수 없는 의구심. 딱 2%의 의구심.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그 2% 찜찜함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다시 복직하기로 한다.

그 직원이 정말 확실한 거냐고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 연말 인사가 진행 중이라고. 다른 의미의 '네'를 반복한다.

그리고 복직을 준비한다.

그 2%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 2%를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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