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기생충, 2019)
*'기생충'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와 '설국열차'의 중후반부 줄거리에 대한 개략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바빠서 개봉 후에 세 달 만에 올리게 되었네요. 아마 이어서 (개봉한 지 두 달 된) '행복한 라짜로'와 (개봉한 지 한 달 반 된) '미드소마'에 대한 리뷰를 올릴 예정입니다.
봉준호의 일곱 번째 장편 ‘기생충’에서도 그의 영화세계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여전하게 기능한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건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생물로 대유하려는 지극히 우화적인 이야기지만, 이와 동시에 이 영화 속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살펴보자니 이건 희망과 절망 사이의 명백한 간극에서 오는 씁쓸한 우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두 요소야말로 봉준호의 영화세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두 개의 키워드라 할 수 있을테고, 그렇다면 ‘기생충’은 어디로 보아도 봉준호가 만든 영화임이 자명해진다.
‘플란더스의 개’, ‘괴물’ 그리고 ‘옥자’처럼 생물을 제목으로 삼은 영화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의 영화는 항상 우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설국열차’의 열차마저도 일종의 유기체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영화세계에서 생물들(로 상징되는 고유한 체계)은 그 자체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결국 생물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부조리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인간 사회의 암부는 때때로 극화되곤 했었다. ‘기생충’에서 각기의 인물들이 이루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기생(寄生)이라는 생물적 특성에 비추어 날카롭게 해부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기생하는 인물들’이 전형적인 기생과는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자 ‘기생충’이 단순히 관념만을 빌려온 영화는 아님이 적나라해진다.) 그러니 ‘기생충’은 봉준호의 우화(寓話)다.
‘괴물’에서도, ‘설국열차’에서도, ‘옥자’에서도, 주인공들은 그들이 속한 제각기 다른 사회에서 발버둥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요원했고, 어느 순간 무력감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력감이란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굴레과도 같은 감정이어서,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서는 절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극의 전환점을 중요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봉준호의 영화에서 희망은 언제나 절망과 맞닿아 있었고, ‘기생충’에 등장하는 가족들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게 되는 것은 희망과 절망 사이의 모호한 간극에서 오는 씁쓸한 우수였다. (이러한 감정은 극에 덧대어진 것처럼 이질적으로 짜여진 에필로그에서 극대화되며, 극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극에 족쇄를 채우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그러니 ‘기생충’은 봉준호의 우수(憂囚)다.
그러나 봉준호의 영화가 대개 그랬듯, ‘기생충’은 통렬한 블랙코미디이자 통쾌한 사회풍자극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기생충’은 사회 그 자체를 치열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봉준호의 영화세계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지극히 대중적인 화법으로 쓰여진 작가주의적 영화. 그렇다면 이제 ‘기생충’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지를 좀 더 깊게 들여다 보아야 할 때이다.
‘기생충’에는 세 가족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반지하 집에 살고 있는 기우(최우식)네 가족이다. 와이파이를 빌려쓰기 위해 온 집안을 누비고, 공짜 소독을 한답시고 열린 창문을 닫지 않는 그들의 일상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피자박스를 접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다분히 의도적인 대사 ‘넷 중 하나는 불량인거지’라는 말이 그 와중에 의미심장하게 꽂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연교(조여정)네 가족이 등장한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대저택에 살고 있는 그들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기생충’의 이야기는 기우가 연교의 딸 다혜(정지소)의 영어 과외선생님으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접어든다. 마치 얽혀있는 사슬을 당기듯, 기정(박소담)이 아들 다송(정현준)의 미술 과외선생님으로 일하게 되고, 이어서 기택(송강호)이 박사장(이선균)의 운전기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원래 가정부로 일하던 문광(이정은)을 모함해 쫓아낸 뒤 충숙(장혜진)이 가정부로 일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진전을 거듭한다.
이쯤 되면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가족에 기생하는 또 다른 하나의 가족. 기우를 시작으로, 연교의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던 인물들은 결국 기우의 가족으로 모두 대체되게 된다. 그러니까 기우의 가족이 연교의 가족 속으로 교묘하게 (정체를 숨긴 채) 잠입하는 것은 얼핏 보면 기생의 특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중반 이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연교의 가족이 다송의 생일을 맞아 캠핑을 떠난 뒤 기생한 가족이 모여 술판을 벌이던 비오는 밤 갑작스레 문광이 찾아온다. 마치 공포영화처럼 기괴하게 느껴지는 이 시퀀스에서, 문광이 열어젖힌 지하실 아래의 또 다른 지하실이라는 공간적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의도적으로 일종의 장르영화처럼 연출된 이 시퀀스는 제 역할을 톡톡히 다한다.) 지하실에는 문광의 남편 근세(박명훈)가 숨어 살고 있었다. 말인즉슨, 이 저택에 완벽하게 기생했다고 생각했던 기우의 가족이 유일한 ‘기생충’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진다. 연교의 가족이 살고 있는 대저택에 두 종류의 가족들이 기생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누가 대저택에 기생할 것인지의 문제가 수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서 ‘기생충’은 변곡을 맞이한다.
기생이라는 행위의 목적이 숙주를 내부에서부터 잠식해 조종하며 그 자리를 꿰차는 것이라 한다면, 이 영화 속 숙주(연교의 가족 그리고 대저택)에 성공적으로 기생하는가 싶었던 기생충(기우의 가족)은 크나큰 적수를 만나게 된다. 그건 또 다른 기생충(문광의 가족)이었다. 그 순간, 기생하던 존재들은 기생의 본질을 잊고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기생은 철저히 자신의 이득을 위한 행위일테지만, 기생하는 존재가 여럿 존재하게 된다면 그저 이득만을 취할 수는 없다. 동일한 숙주에 기생하려는 또 다른 존재를 제거해야만 자신이 성공적으로 기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당연하게도, 봉준호의 2013년작 ‘설국열차’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꼬리칸에서 엔진칸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엔진칸의 지배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수많은 열차 속 군중들은 합심하기보다는 서로를 제거해 나가야만 했다. ‘기생충’에서 기우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이 정확히 그렇다. 그들이 기생하고자 하는 숙주인 연교의 가족과 대저택을 꿰차는 대신, 기생을 위해서 서로를 우선적으로 제거하려는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설국열차’ 중반부까지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겹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충’은 단순히 숙주를 잠식해가는 기생충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문광의 가족이 등장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숙주에 기생하기 위해서 서로를 적으로 돌려 싸워야만 하는 저 아래의 존재들의 암울한 투쟁론으로 탈바꿈한다. 그러자 계층과 계급을 직간접적으로 비유하는 데 거침이 없는 봉준호의 의도가 ‘기생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결국 이미 공고하게 다져진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상부와 하부의 전복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구조 속에서 상부의 존재는 그저 관망하고, 상부로 올라가려는 하부의 존재는 서로를 없애려 사투를 벌일 뿐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하부의 투쟁은 상부의 결속을 깨뜨리기는커녕 하부를 무너뜨릴 뿐이다. 구조를 뒤엎을 수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이 ‘기생충’의 후반부에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기우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 사이의 싸움은, 기생이라는 특성을 떠나 봉준호가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비관적인 시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기생충’ 속 가족들은 철저히 계층적인 시선에서 도식화된 존재들인데, 이는 계단을 매개로 수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기생충’에서 (계단 위)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계단 아래) 낮은 곳에 있다는 것보다 계층적으로 상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좌우의 움직임이 아니라) 상하의 움직임이다. ‘기생충’에서는 이야기가 궤도에 접어드는 중요한 장면들마다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수직적 움직임을 하나의 쇼트 내에서 담아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데, 이러한 묘사 방식이야말로 계층과 계급이라는 상징적 체계를 단순하지만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일례로 기우가 처음으로 대저택을 방문하던 순간, 그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카메라는 뒤에서 따라가며 서서히 높아지는 기우의 모습을 하나의 쇼트로 담아낸다. (기우는 대저택을 방문한 순간 ‘백수 아들’에서 ‘케빈 쌤’이 된다.) 한편, 대저택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지하실이 밝혀지던 순간, 충숙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카메라는 뒤에서 따라가며 서서히 낮아지는 충숙의 모습을 하나의 쇼트로 담아낸다. (그 이후, 충숙을 비롯한 가족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연교의 가족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교의 가족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을 오른다. 그것이 저택 외부의 계단이든 저택 내부의 계단이든, 그들은 일상적으로 계단을 올라야 집에 도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단을 오르는 행위엔 특별할 것이 전혀 없다. 기우의 가족과는 다르게 말이다.
계단을 올라가야 마주할 수 있는 보금자리(대저택)와 계단을 내려가야 마주할 수 있는 보금자리(반지하 집과 대저택의 지하실). 그 잔인한 대비는 문광이 대저택을 찾아온 날 밤 폭우로 극대화된다. 가까스로 연교와 박사장 몰래 저택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기우네 가족은, 대저택을 내려간 뒤에도 차도를, 육교를, 그리고 또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가 그들의 보금자리로 향한다. (이때 기우는 자신의 친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를 되뇌인다. 한탄섞인 목소리로, 기정은 그런 일이 그에게 생길리가 없다며 단언한다.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계층적 차이가 이미 공고하게 자리잡아 있음을 빗속에서 설파하는 이 장면의 울림은 남다르다.) 한편, 기택과 충숙에 의해 다시 대저택의 지하실에 갇히게 된 문광과 근세 역시 그들의 원래 보금자리로 돌아간 셈이 된다. 그러나 반지하 집은 폭우로 물에 잠겨버리고, 지하실 집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버리고 만다.
이튿날 다송의 생일파티에서 파국이 벌어진다. 겉으로만 보자면 이 어이없는 파국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벌어진 비극일 테지만 (그리고 마치 후일담처럼 제시되는 뉴스 보도 속에서 실제로 이 사건은 그렇게 묘사되지만), ‘기생충’의 이야기를 따라온 관객들이라면 이 파국이야말로 수많은 원인들이 겹치고 겹친 공공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거실 탁자 아래 숨어 연교와 박사장의 대화를 엿듣던 때,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언급되는 순간 ‘기생충’은 능란하게 이 이야기가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사살한다.) 생일파티 자리에 피범벅이 된 근세가 나타난 뒤 박사장이 불쾌함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기택이 칼로 박사장을 찌른 것은 앞선 이야기의 흐름을 고려하면 기묘한 연쇄고리를 가지게 된다. (그 직전,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연교는 기택을 바라보며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숙주에 기생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저는 이게 일종의 동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심 믿었던 기택은, 연교와 박사장의 대화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속 본심을 통해 그것이 한낱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기생은 공생일 수 없었고, ‘기생충’ 속 사회에서 숙주에 기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숙주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숙주 속에서 숨죽여 살아가며 그 현실에 만족하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상승과 하강으로 도식화된 이 영화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는 그 움직임의 반동이 중요하다. 아래에 위치한 이들이 올라가려 할 때마다 공고했던 구조는 무너지는 듯 보이지만 위에 위치한 이들의 결속은 여전히 굳건하고, 무너지는 것은 아래에서 함께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연대였다. 근세가 지하에서 나타나는 순간 기생의 가능성은 깨어지고 (유일한 기생충이어야 했던 기택과 그의 가족은, 또다른 경쟁자 근세 그리고 문광과 경쟁하게 된다), 아래의 존재들 사이의 헐거운 연대 역시 무참히 깨어진다 (근세는 기정을 칼로 찌르고, 충숙은 근세를 쇠붙이로 찌른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무력감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휘감는다.
결국 기택과 근세는 모두 하강할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근세가 지하실에서 계단을 올라온 순간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난리법석 속에서 박사장을 찌른 뒤 가까스로 몸을 피한 기택은 스스로 지하실로 숨어들어 하강하는 길을 택한다.
그렇다면 사건이 일단락된 뒤,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병원에서 깨어난 기우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는 이 처절한 우화를 끝마치는 시점에서 그들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움켜쥘 수 있도록, 이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다. 그 바람 속에서는 도망친 기택이 무사히 대저택의 지하실로 숨어들어갔기를 바라는 마음도, 극중 여러 차례 환기되던 모르스 부호로 기택과 기우가 암호 편지를 주고받기를 바라는 소망도, 지금은 다른 가족이 살고 있는 대저택을 언젠간 자신이 구입해 가족 상봉을 꿈꾸고자 하는 야심찬 기우의 포부도 유효하다. 오직 그 염원 속에서만 말이다.
그러나 이 에필로그는 어디로 보아도 이상하다. 영화 내내 기우의 나레이션은 물론 기우의 시점 쇼트조차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고, 지독하게 블랙코미디적인 이 영화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기우가 깨어난 직후 등장하는 의사와 경찰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우는 대저택에서 벌어진 사건 속에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수석에 머리를 두 차례나 가격당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에필로그를 받아들이는 다른 하나는 환상 속 기우의 덧없는 꿈이다. 이 꿈이 끝나면 가족이 다시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미몽. 기우의 편지 속에는 그의 가족이 다시 함께하기 위한 희망찬 이야기가 쓰여져 있지만, 만일 이 에필로그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이 편지를 지하실 속의 기택에게 전달할 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기우가 자신이 쓴 편지를 읊조리고 있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하강하는 카메라는 반지하 집에 사는 가족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지상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가상의 매개체인 와이파이를 찾아서 집안을 헤메고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 기우는 계단을 올라 대저택으로 들어가는 상승을 꿈꾸지만 여전히 반지하에서 편지를 손에 쥐고 있을 뿐이다. (편지는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라는 기원의 말로 끝맺는다. 그러나 ‘그 때’는 언제인지조차 명시되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바람은 간절하지만 꿈은 덧없다. 카메라는 하강한 채로 멈추고, 기우를 비춘 채 그대로 영화는 끝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희망과 절망이 교묘하게 함께 담겨있다고 할지라도, 이건 절망으로 좀 더 기운 이야기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기생하는 한낱 개인이 공고하게 다져진 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오는 냉혹한 현실일 것이다. 기우의 가족도, 문광의 가족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최선을 다하는 범인들이었을 뿐이었고, 연교의 가족 역시 그렇게 태어나 살아왔기에 자신의 자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또 다른 범인들이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오직 모든 것이 시작된 위치였다. 텅 빈 대저택에서 술을 마시며 기택은 자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된 운전기사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충숙은 박사장과 연교를 가리켜 착한 사람들이라고 에둘러 지칭했었다. 그러니까, ‘기생충’에서 벌어진 사건 속에서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지만 그 파국 속에 악인은 없었다. 만약 악이 있다면, 그건 ‘기생충’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빚어내게 한 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사회를 치열하게 묘사한 끝에 도달한 허탈함이야말로 ‘기생충’, 나아가 봉준호라는 영화세계의 역점일 테니까.
-
기생충 / Parasite (기생충, 2019)
dir. 봉준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