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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25. 2020

선택하는 위치에 놓인 이의 황홀경, '미드소마'

아리 애스터 (Midsommar, 2019)

*'미드소마'는 아리 애스터의 전작인 '유전'과 비교해서 볼 때 더욱 흥미롭습니다. 다만 '유전'에 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두 작품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다루지 못해서 아쉽네요.

*'미드소마' 전체에 대한 스포일러, 그리고 '유전'의 소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

아리 애스터의 전작이자 데뷔작인 ‘유전’이 공포영화의 틀 안에서 오컬트라는 자신의 장르적 취향을 교묘하게 흘려넣어 만들어 낸 일종의 변주곡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두 번째 작품 ‘미드소마’는 그 취향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킬 뿐더러 장르 내에서 예상 가능한 틀을 하나씩 부수어가는 방식으로 만들어 낸, 말하자면 일종의 광시곡이다. (호러이든, 컬트이든 장르의 관습을 넘어서) 일반적인 영화의 기승전결적 구조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있는 것 같은 ‘미드소마’는,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들을 중첩시키고 또 중첩시킨 끝에 모든 걸 불사르며 장렬하게 산화한다.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하는 순간에 영화를 매듭지어버린다는 점에서, ‘미드소마’는 그 절정의 해소를 전적으로 관객들에게 맡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끝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관객들은, 결국 이 영화의 엔딩 속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니(플로렌스 퓨)의 입장이 되어 ‘미드소마’라는 훌륭한 괴작을 곱씹을 수밖에 없다.


아리 애스터가 ‘유전’에 이어서 ‘미드소마’에서도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신앙적 행위를 공유하는 소집단’이라는 개념은, 90년마다 9일 간의 하지제를 개최하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 헬싱글란드Hålsingland의 호르가Hårga로 표상된다. (두 편에서는 모두 특정한 집단의 의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미드소마’에서 이 이교도적 소집단은 (‘유전’에서와는 다소 다르게) 이야기 자체의 소재로 활용되며 그 비밀이 천천히, 그러나 예리하게 한 겹씩 벗겨지지만, 아리 애스터라는 이야기꾼이 풀어낼 영화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영화의 처음부터 ‘미드소마’가 평범하게 하지제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는 것에 대한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터. 아리 애스터는 (‘유전’을 통해 쌓아올린) 그런 관객들의 한껏 부풀려진 기대를 ‘미드소마’에서 보란 듯이 충족시킨다.



2.

‘유전’과 ‘미드소마’는 인물의 개인적 방황을 다루면서도 더 큰 맥락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 세계관을 염세적인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인형극처럼 보인다. (실제로 ‘유전’에서는 미니어처라는 모티브가 다층적으로 활용되었고, ‘미드소마’에도 비슷한 시도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영화를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는 첫 장면의 벽화부터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이야기의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플롯이 집약적으로 요약되어 있는 이 첫 장면은, 이미 인물들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절대자처럼 관객들을 ‘미드소마’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후술하게 될 것처럼, ‘미드소마’는 결국 선택하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이지만, 이 선택의 순간은 영화에서 괄호쳐진 채로 묘사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이 선택한다는 점이 아니라, 인물이 선택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유전’과 ‘미드소마’를 만든) 아리 애스터의 영화세계를 단번에 요약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3.

마치 벽화처럼 그려진 이야기의 문이 열리자, ‘한여름의 축제’라는 영화의 제목과는 정반대로 눈 내리는 설산의 모습이 잇달아 제시된다. 높은 음조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이내 그 목소리는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로 전이된다. 그리고 스웨덴에서의 이야기가 궤도에 오르기 전, 일종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지는 미국에서의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미국에서 대니와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프롤로그에서, '미드소마'는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과는 간명하게 대비되는 눈 내리는 한겨울의 이야기를 통해 스웨덴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사건에 대한 일종의 힌트를 제시한다. 이 프롤로그는 결국 가족의 갑작스런 부재, 그리고 연인 사이의 감정적 기류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악되며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대니는 연락이 닿지 않는 여동생에 대한 걱정을 크리스티안에게 내비치지만, 크리스티안은 겉으로는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대니에게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니와 전화할 당시 함께 있던 친구들마저도 그를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국 대니의 여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자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오열하는 대니와 그를 안아주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향해 다가가는 카메라는 그들을 지나쳐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눈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영화의 타이틀 롤이 떠오르고, 비로소 프롤로그는 끝난다. 이 프롤로그 속에서 대니는 가족을 잃었고, 연인과의 관계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4.

그러나 미국에서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프닝 롤 이전까지 영화 전체에 중요한 맥락이 될 두 가지의 관계(가족의 갑작스런 부재, 그리고 연인 사이의 감정적 기류)가 제시되었다면, 그 이후에는 대니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그 맥락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대화, 그리고 대니와 펠레(빌헬름 블롬그렌)의 대화가 바로 그렇다. 가족의 상실을 겉으로는 극복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품고 있는 대니는, 인류학 논문을 위한 자료조사를 목표로 하는 크리스티안 일행과 함께 스웨덴에서 열리는 하지제를 방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대니에게 스웨덴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대니와 이 문제로 사소한 다툼을 벌인다. 이 하지제는 펠레의 출신 마을인 호르가 공동체에서 9일 동안 성대하게 열리는 축제로 소개되는데, 마침내 스웨덴에 가기로 결정한 대니에게 펠레는 자신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대니를 위로한다. 이때 펠레와 대니가 나눈 대화는,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세심하게 쌓아올려지며 '가족' 또는 ‘연인’이라는 관계의 맥락으로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하게 환기된다.




5.

앞서 펠레와 이야기하던 대니는 갑자기 구역질을 느끼며 화장실로 뛰어간다. 그리고 이 장면은, 수직으로 촬영된 부감 쇼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스웨덴으로 향하는 비행기 내부의 화장실로 전환된다. 이 장면은 (특히나 전작 '유전'과 비교할 때) 아리 애스터의 영화세계를 시각적으로 간결하게 압축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질서로부터 아득히 벗어난 것 같은 컬트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세계를 다루면서도, 이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한 차원 위에서 내려다보면 질서정연한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염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다른 공간을 수직으로 촬영된 부감 쇼트로 연결해 이어붙이는 이 장면이야말로, (마치 인형극을 떠올리게 하는) 아리 애스터의 영화세계를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는 스웨덴에 도착한 주인공들이 축제가 열리는 헬싱글란드로 향하는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활용된다. 차를 타고 달리는 대니 일행을 곧게 따라가던 카메라는, 갑자기 카메라를 위아래로 뒤집는 변칙적인 앵글을 통해 입구에 적힌 마을 이름을 거꾸로 보여주고, 다시 카메라를 반대로 뒤집어 올바르게 적힌 마을 이름을 재차 보여준다. 이는 이 거대한 세계 전체를 일종의 (철저하게 통제되는 질서 속) 모형처럼 여기는 아리 애스터의 세계관을 강조함과 동시에, 프롤로그의 시공간적 배경이기도 했던 ‘눈 내리는 한겨울 밤의 미국’을 정반대로 뒤집어 앞으로의 영화가 (제목 '미드소마' 그대로) ‘햇살 쬐는 한여름 낮의 스웨덴’을 다룰 것임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게, 대니 일행이 헬싱글란드에 도착하자 비로소 ‘미드소마’가 시작된다.



6.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펠레의 형제 잉마르(함푸스 할베리)를 만나고, 그의 권유로 곧바로 약에 취한다. 이때 인물들이 경험하는 환각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공유하는 상황 쇼트는 ‘미드소마’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이는 인물과 배경을 유리시키는 동시에 인물을 (움직임을 멈춘) 정적인 존재로, 배경을 (느리게 호흡하는) 동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실제감을 제거한 채, 환각 속 인물들의 몽롱한 상태에만 오롯히 집중하게 하는 이 장면의 효과는 이후 제시될 ‘5월의 여왕’ 시퀀스에서 극대화된다. 이렇듯 ‘미드소마’는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관계이든 (환각이나 신앙에 대한) 감정이든, 처음 제시된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 엔딩에서 폭발시키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스웨덴에 도착한 순간부터 영화의 마지막까지 전체가 클라이막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그리고 물론, 극중 인물들조차) 이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다. 호르가에서 행해지는 기이한 풍습들을 목격할 뿐더러 주위의 방문객들이 차례차례로 사라지지만, 주인공들 중 그 누구도 그 기이한 사건들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이미 주변에 동화된 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영화의 절정을 향해 가만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환각에 빠진 것처럼.




7.

사실 호러 영화의 외관을 지녔으며 어디로 보아도 컬트 영화의 체취를 풍기지만, ‘미드소마’는 생각보다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연모하는 이와 맺어지기 위해 자신의 체모를 활용해 만드는 음료, 순환하는 생애주기에서 72세가 되면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노인들,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선발하는 5월의 여왕이라는 관습적 의례. 사실 이교도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는 익히 예상 가능한 요소들일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리고 주인공들은 여기서 ‘미드소마’의, 나아가 아리 애스터의 기벽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건 이러한 이교도의 세계에 진입하는 외부인들을 이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드소마’가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이 외부인들이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서 내부인의 질서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야기의 텐션이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렇기 때문에 5월의 여왕을 선발하기 위한 춤 경연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분을 몽롱하게 만들어주는 약초를 넣은 차를 마신 채 얼떨결에 우승하게 된 대니는 결국 5월의 여왕이 되어 마을의 풍작을 축복한다. 한편 마을의 소녀가 연정을 품고 자신의 체모를 넣은 차를 마신 크리스티안은 성교를 위해 마련된 방으로 향한다. 크리스티안이 마치 주술적 의식과도 같은 성교에 참여하는 동안, 그런 그의 모습을 목격하고 만 대니는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주저앉는다. 이때 마을의 여인들은 대니의 슬픔에 공감하며 함께 울부짖는데, 흥미롭게도 외부인 대니와 함께 교감하는 내부인들은 영화 상에서는 처음으로 대니에게 ‘공감’하는 인물들이었다. 울부짖는 대니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것, 그건 (부모님과 동반자살을 감행한) 대니의 여동생도, (대니를 다독일 뿐 진심으로 위로해주지 못했던) 크리스티안도 할 수 없었던 행위였다. 이때 펠레가 대니를 붙잡고 이야기했던 대화의 맥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가족을 잃은 펠레가 호르가의 관습 공동체에서 만난 이들을 가족이라고 여긴 것은, 그들이야말로 펠레를 붙들어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잃은 대니에게, 함께 울부짖어줄 수 있는 이들은 그 순간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다. 다시 말해서, 5월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대니를 내부인으로 편입시킨 호르가의 사람들을, 대니는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할 운명에 놓인다.




8.

성교를 끝낸 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온 크리스티안은, 비로소 마을의 비밀을 알아챈다. 사라졌다고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여겨지던 이들은 모두 이 작은 마을의 어딘가에 희생양이 되어 있었고, 숱한 호러 영화에서 비밀을 알아채고 만 인물이 으레 그러하듯 크리스티안 역시 마을 원로에 의해 정체불명의 가루를 들이마시고 쓰러진다. 이 짧은 하지제 동안, 대니는 새로운 5월의 여왕이 되어 마을에 풍작을 기원해 주었으며, 크리스티안은 성교를 통해서 마을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켜 본인의 역할을 다했다. 두 명의 주인공이 제 역할을 끝냈으니, 영화가 비로소 클라이막스에 도달할 차례다. 이제 호르가의 희생 제의가 등장한다.



9.

대니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있고, 크리스티안은 사지가 마비된 상태로 깨어난다. 이윽고 ‘미드소마’ 속 하지제의 피날레라 할 수 있는 제의에서 희생양이 될 인물들이 발표된다. 외부인들을 하지제로 초대한 펠레 그리고 잉마르에 대한 칭찬에 이어서 사라졌던 이들이 제물이 되었음이 공표되고, 5월의 여왕 대니는 마을 사람들 중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발된 인물과 크리스티안 중에서 제물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제물로 선택된 크리스티안은 내장이 꺼내어진 곰 안에 갇힌 채로 호르가의 삼각형 구조물 내부에 앉혀진다. 제단 역할을 할 그 집 안에 차례로 제물들이 배치되고, 집이 불타기 시작한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꽃으로 뒤덮인 드레스 속에서 대니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인물들은 마치 집, 그리고 집 속에서 불타고 있는 제물들의 작열통을 공감하듯이 울부짖으며 뒹굴고, 대니는 갈 곳을 잃은 것마냥 드레스를 입고 배회한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짓던 대니는, 어느 순간부터 물끄러미 불타고 있는 집(그리고 아마도 그 안의 크리스티안)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복잡미묘한 표정은 서서히 미소로 바뀌고, 대니의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앞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집을 교차시키며, ‘미드소마’는 대니의 환희가 가장 절정에 달하는 순간 영화를 돌연 끝내버린다.


이 기가 막힌 엔딩은, 영화 내내 서서히 옥죄어오던 정체불명의 감정을 마치 불태워버리듯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킨다. 이때 타오르는 삼각형의 집과 꽃으로 뒤덮인 삼각형의 드레스를 닮은꼴로 표현했다는 점을 통해 본다면, 삼각형을 불태움으로써 시각적으로 환기되는 카타르시스는 정확히 대니의 것이기도 했다. 앞서 ‘미드소마’에서는 대니가 가족 그리고 연인과 지니는 관계가 중요하게 활용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가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니는 미국에서 가족을 잃었고 스웨덴에서 가족을 얻었다. 그녀가 잃은 가족은 (부모님처럼) 전화를 받지 않아 부재중 메시지를 남겨야 하거나, (여동생처럼) 메일을 보내도 답장을 주지 않는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새롭게 얻은 가족은 그녀의 감정에 함께 울부짖으며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의 뒤에 선 마을 사람들은 앞서 대니와 함께 울부짖었던 것처럼, 불타는 집 속 사람들과 함께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다.) 연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니는 자신에게 지독하게 무심했던 연인에 대한 복수를 달성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을 제물로 삼는다는 대니의 선택은, 그가 5월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결국 호르가라는 특정한 집단적 맥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크리스티안을 불태운 것은 대니가 아니라 호르가의 문화였다.) 그러니까 새롭게 얻게 된 가족도, 크리스티안에의 복수도 그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졌기 때문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0.

그래서, ‘미드소마’는 비로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 인물의 이야기로 보인다. 대니가 선택할 수 없었던 가족의 죽음과 달리, 마지막에 그녀는 5월의 여왕으로서 연인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대니는 선택하는 위치에 놓였을 뿐,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다. (대니가 호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5월의 여왕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이들이 대니를 진정으로 붙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크리스티안의 죽음을 선택하던 순간 고민하는 대니의 모습으로 쇼트는 마무리되고 그 직후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크리스티안은 이미 제물로 바쳐질 준비를 하고 있다.) 말인즉슨 대니가 새로운 가족을 선택하거나 연인의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결코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 영화에서 대니는 선택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부여받은 상태였고, 대니는 선택에 대한 권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건, 모든 것이 한 차원 위에서 보면 통제에 놓여있다고 역설하는 아리 애스터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지점일 것이다. 그러나 대니는 호르가의 하지제를 통해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연인에 대한 복수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은, 엔딩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이 오롯이 대니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공들여 쌓아올린 이야기의 맥락을 모두 불살라버리는 희열을 선사한 끝에, ‘미드소마’는 잿더미로 무너지는 호르가의 집과 대니의 미소를 겹치며 장렬히 산화한다. 나는 ‘미드소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 애스터라는 기이한 예술가의 취향과 기벽의 한 절정을 목격했다. 불타는 한여름 낮의 황홀경, 이 압도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엔딩을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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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Midsommar, 2019)

dir. 아리 애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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