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에는 검소함도 겸손도 없었다.
캠핑 관련 유튜브 동영상을 아무리 돌려봐도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기 1주일 전에 텐트를 마련하는 것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친구들은 아마존으로 싸구려 텐트를 사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우선 앞으로 혹시 캠핑이라는 취미를 시작한다면 비싼 장비를 구입하기 전에 나와 맞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나는 먼저 렌털 샵을 검색했다. 다행히 신주쿠역 근처에 렌털을 하는 곳이 있었다.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들어간 렌털 샵의 사장님은 쌓여있는 장비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외국인이라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봤다.
“나가노로 갑니다”이라고 나는 답했고 사장님은 다시 나에게 “그러니까 어디로 간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다시 물어봤다. 일본에서 산을 탄다면 나가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는 나의 무지와 착각이었다. 사장님은 나가노 현의 캠핑장에 가는지 산에 올라가는지, 날씨와 기온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다짜고짜 평창으로 가는지 낙산으로 가는지 답하지 않고 “강원도로 간다고요!”라고 우기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후 사장은 텐트 방수에 대해 꼼꼼히 알려주었는데 나는 설명을 듣고 “아마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일듯해요”이라 말하자 나를 한심하게 보며 잘 갔다 오라고 했다. 결로현상을 직접 느껴보지 않은 나는 텐트를 치고 들어가자 왜 사장님이 미덥지 않은 눈으로 나를 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샵에서 텐트와 침낭, 발포매트를 빌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배낭에 옷과 헬리녹스 의자도 욱여넣었다. 장비가 배낭에 간신히 들어가서 나는 이걸 다 혼자서 꾸린다면 언젠가 내가 찜해둔 5만 엔 그레고리 배낭도 사야 하나 고민했다. 신주쿠역에서 열차로 약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나가노는 일본에서도 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적이 있는 곳으로 6월에 방문해도 멀리 눈이 쌓인 산을 볼 수 있다. 나가노현의 마츠모토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덴노가 도망갈 곳이기도 했고 에반게리온 세계관에서도 도쿄가 멸망하자 일본이 임시 수도로 삼은 곳이 아니던가. 작년에는 1년 안에 3번이나 나가노현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자연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으나 물가는 비싸고 낡아져 가는 일본의 지방 인프라를 볼 수 있었다. 신주쿠를 떠나는 특급열차는 자리가 없어서 입석으로 이동했는데 캠핑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이 벌써 바닥나고 말았다.
첩첩산중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먼저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아무리 봐도 등산객으로 보이지 않는 비실비실한 사람들은 역 앞의 어느 소실점으로 향해 달려가 줄을 섰다. 경기도 광역버스로 단련된 사람으로서 줄을 1미터라도 뒤에 서게 되면 버스가 꽉 차서 이동에 30분 이상 지체되는 것을 몸소 아는 나는 물새처럼 지체 없이 이동했다. 다행히 줄을 서면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보급조차 가능한 흔한 편의점도 없었다. 다행히도 버스는 금방 20분 주기로 왔다. 버스는 행락객 각자의 살림도구가 들어간 배낭으로 꽉 찼다. 나는 이게 여행인지 피난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캠핑장에 자동차를 끌고 온 사람들은 뭐든지 독보적이었다. 자동차로 장비를 가져온 사람들은 짐을 밴에서 수레로 옮기고 주차장에서 산 너머의 텐트장으로 마치 서부영화의 개척자들처럼 캠핑장으로 떠났다. 사람들은 마치 몇 년 간 참아왔다는 듯이 마치 약속의 땅에 도착한 부족들처럼 캠핑장의 각자의 안식처를 꾸려갔다. 이는 클럽에 가방조차 가져가지 않는 나에게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캠핑장에는 스노우피크가 제일 많았고 무대 근처에는 값비싼 노스페이스의 지오돔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멀리 도달한 캠핑장에는 검소함도 겸손도 없었다. 캠핑장에는 옆사람의 소리가 회사 동료들의 목소리보다 더 민감하게 더 잘 들린다는 점을 텐트를 치면서 알게 되었다.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사람들이 밤이 되면 아무 데나 용변을 보는 모습을 보고 이게 산속인지 심야의 도쿄 거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의 도쿄를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자들은 도쿄가 얼마나 지저분해졌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햇살은 따가웠고 나는 빨리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새벽부터 출발해 일찍 도착한 덕분에 나는 캠핑장에서 가장 구석진 곳으로 달려가 텐트를 쳤다. 유튜브로 미리 이론을 공부했지만 정작 나는 텐트의 패그를 박을 망치를 깜빡했다. 결국 페그를 트레킹화로 밟았는데 폭신폭신한 나의 호카오네오네의 비명과 고통이 느껴졌다. 텐트 페그는 13개가 있었으나 정작 나는 어디에 더 박을지 몰라 10개만 치고 말았다. 텐트를 치면서 페그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변상해야 한다는 렌털 샵 사장님 얼굴이 떠올랐다. 자고로 남의 떡이 더 크다고 했다. 넓은 캠핑장에서 나는 혼자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텐트를 치면서 흐느꼈다. 내 텐트가 가장 작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의 텐트와 타인의 텐트를 비교하며 서울 시민들이 왜 부동산 투기에 넋을 잃었는지 그 원초적 광기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텐트 내부에는 잔디에서 올라오는 습기로 결로가 생기기 시작했다. 좁은 텐트 속에서 나는 눈물과 이슬을 닦으며 "브로크백 마운틴"의 잭과 애니스는 어떻게 텐트의 결로현상을 해결했을지 궁금했다.
페스티벌 측 정보에 의하면 음식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스박스에 음식과 음료를 챙겨 왔다. 캠핑장에는 식수대가 없었고 배가 고프거나 푸드트럭에서 최소 1000엔을 하는 음식과 음료를 사 먹어야 했다. 마치 2년 간의 코로나 창궐 속 올림픽을 개최해낸 나라에서 삶의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은 당연하듯이 주최 측의 반입 금지 요청을 무시하고 미리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요령을 배웠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몇몇은 양주병으로 코냑을 마시고 있었고 심지어 주최 측에서 강력히 금지한 화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페스티벌에서 물을 쉽게 마실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춤도 추기 어렵다. 대부분의 음식은 양호했으나 정작 푸드트럭에서는 음료도 팔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모든 음료는 주최 측이 운영하는 카운터에서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음료 카운터에는 사람들이 최소 600엔이나 하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사방에 노상방뇨를 하는 곳에서 시냇물을 떠다 마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랍의 봄 혁명 당시 이집트 정부는 시민들의 결집을 막기 위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봉쇄하며 먼저 식량과 물의 보급을 막기 위해 근처 매점과 노상점을 단속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은 나는 이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갈 때는 반드시 나 자신이 마실 수 있는 물을 챙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단체 캠핑객들이 아직 텐트를 치고 있을 무렵 나는 나의 생존을 먼저 챙기기로 했다. 나는 아직 패그를 박는 망치소리가 매아리치는 캠핑장 주변을 살피다가 오래된 자판기를 발견하고 아직 팔리지 않은 생수병을 미리 사재기하듯 구입했다. 역시나 생수는 곧 다 팔렸다. 나는 내가 혼자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미증유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미니멀리스트라는 삶은 지속 불가능했다. 생수이건 파스타이건 부탄가스이건 필요한 물건은 평소에 많이 사 두어야 한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를 페스티벌에 초대해준 디제이 HibiBliss가 오프닝 공연으로 한국의 국악을 틀을 무렵 나는 오로지 생존을 생각하며 마치 맥락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