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게이 클럽 너머의 삶을 꿈꿀 수 있을까?
지퍼가 물리는 텐트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캠핑은 계획을 짜고, 짐을 정리하고, 동시에 집도 청소하고 집에 돌아와 짐을 푸는 가사활동이 약 5배나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다. 나는 캠핑을 하는 남자들 특히 청소와 설거지가 부담스러운 바비큐를 즐기는 남자들의 노동력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캠핑은 해외 타지에서 자취하고 있는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로서 마치 지구를 떠나 달에 기지를 구축하고 월면에서 다시 로켓을 만들어 화성으로 떠나는 과정만큼 고생스러운 일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즐겨 찾았다. 미술관의 절제된 화이트 큐브에서 미학을 함양했다. 이어 가구와 인테리어 조명등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퀴어로 자라난 나는 중학교 이래 15년 만에 처음 들어간 텐트에서 경험한 결로 현상은 벽에 낀 곰팡이처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온을 위해 공기 순환이 쉽지 않은 텐트에서는 방귀도 배출되지 않는 점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나는 나의 존엄을 위해 타인을 텐트로 초대하는 일은 아마 없을 듯하다. 하지만 실망은 새로운 절망을 낳았다. 나는 재 자신에게 물어봤다. 과연 우리 퀴어들은 몸을 극한으로 가꾸어 머리를 짧게 다듬고 주말마다 니쵸메나 이태원에 집합하는 삶의 굴레와 물리적인 시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캠핑장에는 어린이들도 있었는데 평소 음악 이벤트에 어린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나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동성혼이 합법화되더라도 (주: 6월 오사카 동성혼 지방재판소 패소 후 일본의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동성혼 운동"을 "결혼의 평등권"로 명칭을 새롭게 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게이 파티에 어린이를 대려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에 나는 이성애자들은 참 팔자가 편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캠핑장의 눈에 띄는 곳에는 커다란 텐트에 무지개 깃발을 올린 사람들도 있었다. 무지개 깃발은 "이 텐트에 퀴어들이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지나갈 때마다 텐트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음악을 듣기 위해 스테이지로 갔지만 일본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 중 춤새에 맵시가 있는 남자들은 없었다. 후일 내가 음악 페스티벌에 가서 너무 외로웠다고 인스타그램에 하소연하자 같은 페스티벌에 참가한 어느 영국인 게이가 무슨 말을 하냐고 그날 그 산에는 게이들이 많다고 했다. 물론 사실 나도 어플을 꼼꼼히 돌려봐서 근처에 게이들이 약 10명 정도 참가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춤추지 않고 엉덩이가 얌전한 게이들은 그저 이성애자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적 지향성을 떠나 어떤 음악에도 춤을 추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밤이 되자 나가노의 숲은 영상 10도로 떨어졌고 두꺼운 옷을 챙기지 않은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플레이아데스 성군이 밝게 빛나는 하늘 아래 흘러나오는 음악은 나에게 모두 새로웠다. 평소에 듣지 않는 음악을 골고루 듣고 새로운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만난 게 음악 페스티벌의 가장 멋진 점이다. 캠핑장 반대편 산에 설치된 스테이지 근처에 누군가의 호의로 켜진 모닥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며 나는 약 10년 전에 갔던 지산 팍 페스티벌과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그리고 서울인기를 추억했다. 지산에서 들었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과 케미컬 브라더스의 무대는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그민페의 클레지콰이와 서울인기의 요한 일렉트릭 바흐의 디제잉도 즐거웠다. 서울인기를 찾았을 때는 사방에서 쏟아지던 매미 오줌에 젖은 나의 몸을 식히기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야외에 설치된 풀에서 수영을 즐겼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올해 서울인기가 성공리에 열리기를 소망한다.
이번 페스티벌의 최대 목표 중 하나는 새벽 4시에 열리기로 했던 Total Freedom의 디제잉 감상이었다. 새벽 3시가 되고 모닥불이 죽어가자 나는 조금 쉬기 위해서 눅눅한 텐트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그러나 텐트에 들어가자 몸이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꿀물을 찾는 어느 망국의 군주처럼 집에서 모카포트를 챙겨서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정신이 몽롱해지고 멀리 메인 스테이지의 디제이 Nobu의 테크노를 들으며 잠을 자고 말았다. 그날 밤 미국 플로리다에서 날아온 Total Freedom의 활약은 다른 인스타그램 셀럽들의 스토리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밤 니쵸메에서는 젊은 고고보이들이 속옷 없이 타월 한 장 만을 걸치고 스테이지에 춤을 추었다. 이 중 몇몇의 고고보이들에게는 그 스테이지가 그들에게 있어 데뷔 스테이지였는데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긴장이 충분히 전해졌다. 내가 만약 그날 그 스테이지에서 고고보이로서 춤을 추었다면 생기 넘치는 일본 남정네들에 대한 경외와 변하지 않는 게이 서킷 파티의 비루함에 대해 글을 썼을 것이다. 한편 나를 고고보이로서 초대한 대학교 후배 디제이는 과음하고 말아 그날의 기억을 상실했다고 했다.
텐트 안에서 잠은 약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눈이 잠깐 뜨이자 나는 바로 이곳에서 본능적으로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시간은 아침 6시였지만 바로 텐트를 철수하고 카레 푸드트럭에서 비르야니를 사 먹고 가볍게 스테이지에 들려 레이브를 추었다. 춤을 추면서 나는 아마 이성애자들을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 국민체조 대신 흐느적 춤을 추면서 나 같은 퀴어들은 예를 들어 플라이피싱 같은 자연친화적인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느껴졌다. 비싼 텐트를 사는 것보다 집에 루이스 폴센 조명을 달고 바카라 크리스털 잔을 사서 싸구려 위스키로 체워 마시는 게 나의 중년 라이프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 체념했다. 음악 페스티벌도 좋지만 캐주얼한 양복을 입고 극장에서 오페라와 심포니를 듣는 게 더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의 게이 타운 도쿄도 나카노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수도권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나는 제주로 이주할 수 있을까? 나는 30대를 넘기고 서울과 도쿄를 빠져나가 충청도나 제주도, 오키나와로 이주한 퀴어 지인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자연 앞에 패배한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나는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니쵸메의 우악스러운 손님들과 을지로의 화장실, 이태원 호모 언덕의 빗물이 누수되는 클럽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야외의 음악과 공기가 좋아도 현실은 도시에서 떠날 수 없음을. 도심에 사는 퀴어들은 사회 각층에 무작위로 존재하기에 같은 공간과 교류에서 생겨나는 그 격차와 낙차가 퀴어 문화를 돌리는 무한한 원동력이라고 나는 본다. 하지만 생존 목표만이 남은 캠핑장에서는 모두가 조금 칙칙했다. 자연 앞에 모두는 평등한 법이다. 자연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없는 법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태양이 몇 백 미터라도 가까워 지기 때문에 피부는 마른하늘 아래 쉽게 타버리고 만다. 나는 침낭을 정리하기 전에 마스크팩을 꺼내서 하루 종일 고생한 얼굴에게 용서를 빌었다. 도망치듯이 짐을 배낭 속에 넣고 나는 캠핑장을 떠나는 셔틀버스를 타기 전 마지막 춤을 추기 위해 다시 스테이지로 갔다. 때는 아침 8시였고 강한 아침 햇살 아래 내 옆에는 마치 오늘 따윈 없듯이 맥주를 마시며 열심히 춤을 추는 중년 남성과 아스팔트 위에서 맨발로 서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성분이 있었다. 나는 문득 그들이 비비크림을 잘 발랐는지 걱정스러웠다. 돌아오는 길도 이곳에 쓰기에는 여러 가지 구차한 사연으로 인해 고생스러웠다. 열차에는 등산객으로 보이는 다른 중년 남성이 만취한 듯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열차가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아테네의 야산에서 보름달을 보다가 실족사한 스코틀랜드의 트랜스젠더 디제이 Sophie (링크)를 들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