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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Dec 17. 2018

소소한 행복 or 마약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 선 소확행.

소확행이라는 조어가 생긴 요즘이지만 사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란 것의 양면성은 일상을 뒤흔들만큼 결정적인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의지의 문제로 볼 수 있다는 관점도 있겠지만 나로선 내면의 의지 문제, 개인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확행이 가능한 물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물적 조건이 모두에게 균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개인 의지의 문제로 보일수는 있겠다. 하지만 결국 소확행의 물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면에서는 내면, 개인의 의지만을 말하진 않는다. 


최근에 방구석 1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독립영화 한편을 소개했다. 소공녀라는 영화였다. 영화의 주인공이 방세를 포기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있다. 한 잔의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이 세가지를 통해서 일상의 행복을 느끼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을 버리고 위 3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과연 소확행인가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서 그 이는 저 3가지 물적 토대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상대성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 말이다. 선택이라면 반드시 포기를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과 포기라면 어쩌면 욕망의 억제와 향유의 2가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상대성이라면 그것은 주체와도 연관이 있을것 같다. 또는 타자화된 주체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 같다.


선택, 포기, 욕망, 상대성, 주체, 획일성.


이런 것들이 소확행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은 개인 차원의 문제이다. 헌데 그러한 개인적 문제들을 강제(?)하는 구조적, 사회적 힘이 존재한다. 그것이 가시적인 시스템일 수도 있고, 비가시적인 문화적 요인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개인성을 유인 또는 강제하는 구조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무 억울하니까. 소확행이라는 표현으로 내 행복의 크기를 내 스스로 정한다는 착각 속에서 내가 발 디딘 현실의 구조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개인적 의지의 문제로 돌려 눈을 가리우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한 억울함을 감지하는 순간 소확행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일상의 마약 쯤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조차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질없다. 생명 앞에서. 살아있음 앞에서. 

그리고 생명과 살아 있음의 반대말 같지만 같은 말인 죽음 앞에서.


죽음을 향한 살아있음의 자각이 이끄는 두 갈래 길. 

삶의 의지와 삶의 포기. 

그러나 삶과 죽음조차 등떠밀리는 듯한 지옥을 향한 몸부림. 

그 몸부림의 애잔함과 애잔함 몸부림을 팔짱끼고 바라보는 거만하고 이기적인 욕망덩어리들의 세상. 


한 세상 속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 선 소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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