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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May 14. 2023

8년차 방송 피디 이야기

#1 프롤로그


기계과 4학년 여름. 방송 피디라는 꿈이 생겼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디가 되고 싶다는 내 말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말보다 더 의아했던 것 같다. 아니 돈 잘 버는 편한 길 놔두고 왜? 덕분에 귀가 종잇장보다 얇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사소한 도전을 시작할 때에도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긴 시간 고민하는 성격이었으니, 미래를 준비하는 상황엔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대형 서점을 기웃거리며 알아낼 수 있는 최대한을 얻으려 애썼다.


피디가 되는 방법은 알 것도 같았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래서인지 공부 방법을 설명한 친절한 글이나 스터디 모집 공고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는 얻기가 어려웠다. 이제 막 피디가 된 사람들의 일상 말이다. 20년쯤 된 유명 피디들의 인터뷰는 너무 먼 미래였고, 떠도는 합격 수기는 피디 인생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 험난한 고시에 뛰어들려면 피디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창 일할 연차의 피디들의 삶을 알아야 하는데. 대체 입사한 사람들은 메인피디가 될 때까지 뭘 하는 것일까. 블랙홀처럼 비어 있는 20여 년의 공백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다들 글 쓰는 걸 싫어하나? 언시생 때 작문 연습을 하도 해서 학을 뗀 건가? 영상 찍고 만드는 게 좋아서 피디가 된 것일 테니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그냥 내가 빨리 피디가 되어 이야기를 남겨 봐야지.


합격 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다. 그냥 다들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주어진 업무 말고 다른 일을 할 시간은커녕, 스스로의 건강을 돌볼 시간조차 없는 것이 조연출의 일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꼬박꼬박 지켜오던 일기 시간이 합격과 함께 사라졌음을 인지한 순간, 기억의 휘발이 아까워 날림으로 메모를 남기며 생각했다. 여유가 조금만 생겨봐라. 내가 이 시간들을 기록할 테니.


하지만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 사이에 오아시스처럼 찾아오는 휴가 기간이나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기획 기간에 글과 사진을 갈무리하며 시도해 보았으나, 몇 개월에 걸쳐 소진된 에너지를 채우기에도 부족한 시간인 데다 완충되기 무섭게 휘몰아치는 일정이 찾아오곤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직을 두 번이나 한 8년차가 되었고, 프로그램을 만들며 생기는 감정과 생각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버렸다. 일반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을 보니 사원 4년에 대리 4년을 합하면 9년차쯤엔 과장이던데. 과장님이 전하는 사원 시절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듣기 싫을 것 같다. 내가 쓰려는 글이 대단한 위인전이면 또 모르지만 그건 거대 기업 회장님이나 성공한 예술가가 본인의 삶을 돌아보며 쓰는 거니까 한 20년쯤 뒤로 미루기로 하고. 지금 쓰고 싶은 글은 당장 써야 한다. 연차가 한 해라도 더 쌓였을 때. 기록의 빛이 더 바래기 전에. 휘발되기 전에. 마지노선인 바로 지금.


그래서 첫 글을 주 100시간은 우습게 일하는 지금 올린다. 이직 직전, 팽팽 노는 기간에 연재를 마치고 싶었지만 나는 미루기의 아이콘이니까. 그나마 그때 끄적거려 둔 목차를 보면 이렇다.


전반부는 공대 피디의 케이팝 적응 실패기. 아이돌의 이응도 몰랐던 신입 피디가 케이팝 중심 채널에서 굴러다닌 이야기다. 음악 예능팀으로 일하며 어떻게든 적응해 보고자 고군분투했던 무대 뒤의 스토리가 중심이 될 것 같다.


후반부는 한국 피디의 외국계 적응 실패기. 외국계 회사 소속 스튜디오에 합류하며 겪은 생경한 경험 이야기다. 이직과 동시에 완전히 달라져버린 회사 분위기에서 커리어 변곡점을 맞이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내용이 될 것이다.


사실 이 글들엔 명확한 타겟이 있다. 첫 번째는 피디를 하고픈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 요즘은 비교적 정보가 많아져서 수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꿈이 내 꿈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심한 갈증을 느끼며 분투하던 과거의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한 명이라도 읽고 도움을 받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나처럼 소위 허리 연차가 된 모든 업계의 직장인들. 회사에 합격했다고 끝이 아니고, 한 번 이직했다고 끝이 아니라는 사실은 때때로 힘겹게 느껴진다. 오히려 취준생일 때가 그리울 만큼, 나이를 먹고 연차를 먹으며 괜찮은 직원이자 선배가 되어가는 과정은 어렵기만 하다. 어디 말하기도 녹록지 않은 허리 연차들의 고민을, 함께 공감하는 과정에서 해소해 나가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다.


글은 이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열네 개가 될 것이다. 매주 한 개씩 올리려는 계획인데 실현이 되려나. 실현이 됐으면 좋겠다. 한두 주쯤 늦어지더라도 여름 내에 마무리하면 좋겠고. 매거진으로 연재해서 브런치북 만드는 것이 목표이자 버킷리스트니까. 직장 생활 8년차면 버킷리스트 하나쯤 달성할 때도 됐잖아? 얼른 이 글 발행하고 편집하러 가야 하니 이만 줄이지만, 조금 덜 정제된 글이더라도 잠재적 독자님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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