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8 언저리의 기록
새해를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2023년을 붙잡느라 그런 건 아니다. 단지 시작하기를 주저하는 중이었는데. 그러는 사이 첫 달이 반절 넘게 지났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놀랐다.
이건 전부 빕스 알바생 이야기 때문이다. 연말이었나 연초였나. 몽글몽글한 그맘때를 기념하여 팀원들과 맛있는 걸 먹는 자리였다. (평소엔 식대가 정해져 있어서 먹지 못하는 멋진 중국집이었다.) 왜 우리는 피디인데 돈을 못 벌고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은 저렇게 돈을 많이 벌지? 라는 가볍고도 무거운 푸념이 주제로 떠올랐다. 우린 빕스 알바생이고 저들은 연남동 잘 나가는 레스토랑 사장이니까요. 항상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후배가 말했다.
빕스 알바생 피디
빕스 알바생이라니 빕스 알바생이라니. 며칠 후 그 후배는 빕스 알바생이 아니라 연남동의 힙한 대형 카페 직원이라고 정정해 주었지만, 빕스 알바생이라는 워딩의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대기업 피디일 때는 빕스 알바생이었지만 지금은 작고 트렌디한 회사 소속이니 연남동 카페 직원이에요. 선배 좀 위안이 되셨나요? 나와 지난번 회사가 똑같았던 그는 (= 나처럼 빕스 알바생이었던 그는) 애써 자기 위안 같은 말을 보탰지만, 그런다고 해서 연남동 카페 직원과 잘 나가는 레스토랑 사장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피디를 하는 이유는 내 것을 만들고 싶어서인 건데. 이 업계에서 내 것을 만들 확률은 대체 얼마쯤 될까. 적어도 레거시에 있는 이상, 본인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100명 중 10명일 테고, 회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오직 내가 원하는 걸 만드는 사람은 그 가운데 한두 명 정도일 거다. 규모가 큰 판인 만큼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건 당연하므로, 내 것을 만들겠다고 무던히 주장하고 노력하고 애써야만, 거기에 운이 한소끔 더해져야만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프로그램을 소개할 만한 피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피디가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직 메인피디가 될 목적으로 시작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업을 시작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좋은 동료들과 와글와글 모여서 몰입하는 게 좋았고,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을 조율해서 맞춰나가는 과정이 좋았고, 그 결과가 보는 이들에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무언가이길 바라서, 오감을 만족시키는(아니 그러고 보니 오감도 아니네... 이감만족) 영상에 내 이름을 남기는 것이 뿌듯할 것 같아 시작한 거였다.
그런데도 빕스 알바생 이야기를 듣고 맥이 탁 풀려버린 이유는 뭘까. 요즘 유튜브 크리에이터나 사업가처럼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던 중이긴 했다. 내 것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사실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깨닫고도 두려워서 흐린 눈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편한 길을 찾다가 고이고 있는 현실을 정면으로 찔려버린 건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니, 진짜 하고 싶긴 한 거니, 라는 질문을 받은 느낌이다.
사장님이 되자
며칠 전엔 한 크리에이터의 강연을 구매했다. 가장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인 ODG의 솔파 강의. 카드를 긁으며 깨달은 건, 정작 제작 자체에 대한 배움을 위해 적극 노력해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속한 프로그램의 촬영과 편집을 통해 성장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회사 밖에서의 적극적인 배움을 통해 직접적 인사이트를 얻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거다.
강의 속에서 솔파님은 말했다. 무작정 프리미어며 포토샵 같은 화려한 기능부터 배울 게 아니라, 뭘 만들고 싶은지 먼저 생각하고 그 방향의 노력을 시작하라고. 세상 모든 장르의 영상 제작을 섭렵할 것도 아니면서, 음악 장르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빨리 이 프로그램도 하고 저 프로그램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불과 몇 달 전에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새로운 기획, 촬영, 편집 경험도 좋지만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연단위까지 걸리는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하다가 어느 세월에 내 걸 만들겠냐고. 좋은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세상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생각만큼이나 물리적으로 무모한 생각이었던 건데, 그땐 그걸 몰랐다.
결과적으로 내 배는 제자리를 돌고 있었던 셈이다. 가고자 하는 방향의 소실점을 먼저 찍은 다음, 필요한 것 위주로 적극 배워나가도 부족할 타이밍인데. 그래서 분명 너무 좋은 팀에서 너무 좋은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는데도 뭔가 구멍 하나가 뚫린 것 같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만 같고 그랬던 거겠지. 회사만 바라보고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뭔가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 아니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기획안을 쓸 때에도 "하고 싶은 것"보다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치우쳐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쓰면서도 답답해지기만 하고. 얼마 전엔 기획안을 밤새 다듬어서 제출했다가, 업계가 힘들어서, 굵직한 섭외가 아직 없어서, 차별화 포인트가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솔직히 좀 힘들겠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아 내 시야가 이미 너무 좁아졌구나, 이런 큰 판에서 이쑤시개 하나 들고 싸우려 하는구나, 회사에만 매몰된 시야를 바꾸지 않으면 스스로 묻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 집안일을 했다. 후배들에게 쉴 수 있을 때 쉬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면서도 출근 안 하는 날엔 전전긍긍하곤 했는데. 마음을 다잡고 폰을 버려둔 채, 고요함 속에서 이불을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청소만큼 들인 품에 대한 결과값이 직관적으로 나오는 것도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그렇게 집과 마음을 청소하고는, 또 고요한 길을 30분 정도 걸어 가장 좋아하는 카페로 왔다.
팀 내 관계, 촬영과 편집, 회의, 그리고 이직. 뭐 이런 근시안적인 고민들의 해결만으로 보낸 것이 지난 8년이라면, 이젠 좀 한 발짝 떨어져서 원거리의 고민을 지속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성공하려고 출퇴근하는 피디 말고, 내 꿈이 명확한 피디이되 회사와 상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어렵겠지만, 또 내일 출근하면 주말을 반납한 채 시사를 향해 달리겠지만, 이 끈을 놓지 않고 올해를 지내면 일 년 뒤엔 좀 다른 시야가 열려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