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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Feb 15. 2024

그만두긴 글렀다

240214 언저리의 기록


#1


촬영 날의 그 약간 들떠 있는, 긴장감 한소끔 넣은 약간의 설렘을 좋아한다. 잘 차려놓은 밥상을 출연자가 마음껏 먹어주길 바라면서 들여가는 날. 촬영과 동시에 우리에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비상 상황이 시작된다. 뭔가 일이 터지면 십중팔구는 해결하여 없애면 될 문제이지만, 때로는 상황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어시스트를 해낼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것이다. 출연자에게로의 이 어시스트를 얼마나 잘 해내느냐가 촬영 잘하는 제작팀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 아닐지. 멋진 어시스트를 기록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나가는 쫄깃함을 느끼며, 구기종목 단체전을 하는 선수들의 마음을 종종 상상한다.


촬영한 지 대체 얼마나 된 건지를 헤아려본 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칫솔질을 하며 편집실 화장실로 걸어가면서였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같은 자리에서 대체로 같은 음식(주 6회 이상의 서브웨이와 멋진 배달음식들)을 먹고, 양치 후 다시 모니터 앞에 앉는 뭔가 단조로운 루틴이 계속되다 보니 약간 지루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 편집실엔 넓은 창문이 있어서 햇볕도 보고 바람도 맞고 가끔 하얗게 눈 쌓이는 모양도 보며 계절감을 즐길 수 있는데. 불빛 가득한 밤 풍경과 어슴푸레한 아침나절의 하늘, 그리고 햇빛이 길게 들어오는 오후 다섯 시의 여운까지도 다채롭게 느낄 수 있는데. 좋은 것도 계속되면 좋은 줄 모르는 걸 보니 내가 사람이 맞긴 한 것 같다. 신나게 촬영하고 돌아온 게 대체 언제지 싶어서 달력을 보니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오후 다섯 시의 편집실


#2


사실 편집도 제법 좋아한다.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건 특권이니까. 직접 찍어온 그림을 붙이는 희열은 더 대단하다. 촬영하면서 이렇게 붙여야지, 생각했던 것을 떠올리다 보면 과거의 나와 소통하는 느낌도 좀 들고. 아무튼 재밌다.


물론 방대한 양의 프리뷰 분량을 몇날며칠 끌어안고 들여다보다가 구성하고 붙이며 조각가의 마음으로 다듬다 보면 으 언제 끝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머리까지 올라올 때도 있긴 있다. 하지만 모든 창작 과정이 그렇듯, 내용과 상관없이 편집 기간은 확실히 좀 지난한 법이니까. 그리고 이런 힘든 과정이 있어야 멋진 결과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힘들게 만들었다고 해서 다 재밌는 건 아니지만, 재밌는 편집본엔 꼭 힘든 과정이 있더라는 건 사실이라서, 편집이 잘 안 될 때면 아이고 또 무슨 대작이 나오려고 이러나, 라는 말을 일부러 읊조리곤 한다. 어차피 시사는 지나가기 마련이지 않나. 시사가 지나고 나서 찜찜했던 날보다 개운했던 날이 훨씬 많은 걸 보면 노력을 대충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게 다 편집이 재밌어서 가능했던 거겠지.


#3


하지만 후반작업은? 으 싫다. 자막과 그림 작업을 의뢰하고 받아서 얹고 수정을 또 의뢰하고 받아서 얹고 음악과 효과를 받아 얹고 또 수정하고 믹싱하고 또 수정하는 이 방대한!! 통상 종편이라고 부르는 과정들. 회의실로 출퇴근을 시작하면 오 기획 기간이군, 하며 좋아할 수 있다. 프리미어를 세팅하면서는 오 편집 기간이군, 하며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편집실 벽면에 자막폼을 인쇄하여 걸면 오 종편이군, 하며 좋아해야 하는데 그 기간은 도저히 좋아지질 않곤 했다. 마치 주사실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하기 싫다는 말을 반복했던 기억뿐. 솔직히 고백하자면 너무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포장지를 만드는 과정이라 즐거울 법도 한데, 그리고 다른 과정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까지 더욱 비효율적이진 않은데 왜 이렇게까지 싫어했는지 모를 일이다.


오랜만에 하는 종편을 코앞에 두고 나는 의뢰 방법을 까먹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까먹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다 보니 또 금방 하더라고. 몇 개월 만에 돌아오는 촬영이나 편집처럼, 이걸 할 수 있긴 한 건가, 생각하다가도 체화된 어떤 기억에 의지해 착착 해내고야 말았다. 마스터본을 열어 가자막 빈 곳을 찾아 촘촘히 채워 넣은 다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신나게 자막지를 적은 새벽.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기로 한다. 솔직히 이번엔 제법 재미를 느꼈다. 너무 놀라서 이 글을 쓰는 것도 맞음. 피디의 일상을 적으며 종편 얘기를 쓸 줄은 정말 몰랐다. 하 종편에서까지 재미를 느끼면 안 되는데. 역시 이 일엔 뭐 하나 재미없는 게 없다. 온갖 비효율적인 과정이 잔뜩 모여있는 방송계라고 투덜대다가도, 그래도 이 일만 한 게 없지, 라는 희망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걸 보니 나는 이 업계를 떠나기 그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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