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었고 세련됨과 동시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대도시의 사랑법. 소설이 나왔을 때부터 제목이 너무 쫀득하고 세련되어 보이고 발길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글자 배치와 균형도, 글자가 쓰였을 때 마무리감도 더도 덜도 말고 딱 좋은 느낌. 내 또래가 쓴 소설이 영화화되면 어떻게 표현될까, 하고 보는데 너무 흥미로웠다. 하필 학교 다니던 시절 불문과를 배경으로 시작되는데 그 당시 핸드폰 화면도, 언덕진 골목의 자취 원룸들도, 대동제 주점, 계단형 강의실도, 문학 전공인 친구들이 취업을 위해 경영 복전 하던 트렌드도 생각나 추억 돋았다.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 음악도 좋고 하나 같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문란한 여자로 소문난 김고은이 연기한 재희는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다 보는 앞에서 스웩 있게 웃통을 깐다. 클럽을 다니고 여러 남자를 만나며 담배를 피우지만 공부할 땐 또 열심히 한다. 그러다 우정을 쌓게 된 게이 친구 흥수는 소설가가 꿈이다. 아무 일도 벌어질 일 없는 안전한 사이인 재희와 흥수는 재희의 자취방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 캐릭터인 재희가 결국 취업을 해 다른 또래들의 코스대로 살아가는데, 회사 상사에게도 쓴소리를 하고 할 말을 하며 자기 캐릭터대로 산다. 쟤는 왜 저래? 왜 이리 유난이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모습을 알아 봐주는 남자를 만나서 마지막엔 결혼도 한다. 재희의 모습에서 내가 비쳐 보였다. 끝까지 너를 잃지 말고 너답게 살아,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김고은은 애를 가진 거예요?” 나와 영화를 같이 본 남자 1이 말한다.
“그런 것 아닐까요? 산부인과에서 의사가 그렇게 산 대가라고 소리 지르며 보여준 게 초음파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낙태한 거 맞는 거 같은데요?” 남자 2가 말했다.
“그럼 그 남자랑 병원을 가지 왜 친구(흥수)랑 간 거지.”남자 1이 물었다.
“뭐 누군지 모를 수도 있고 하룻밤 상대겠죠. 여자가 조심했어야지. 좀 그렇더라고요.” 남자 2가 말했다.
“네? 아니 그게 왜 여자 잘못이에요? 전 남자 잘못이 90프로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당연히 임신을 원치 않았을 텐데. 그렇게 동의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리고 남자가 강제로 했을 수도 있잖아요. 여자는 원치 않는데.“ 라고 내가 말했다. 아니면 남자가 실수한 뒤 여자한테 말을 안해서 몰랐을수도. 요즘 원치 않는 임신이든 유산이든 난임이든 뭐든 여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동료와 종종 나누던 터라 웃음기 없이 말했다. 날카롭게 들렸을 것 같다.
“아니 남자가 그러자고 해도 응하지 말았어야지.” 하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 1이 막 바로 말했다.
“아니, 응하지 않을 수 없게 졸랐을 수도 있고요. 여자는! 흠.. 아니에요.” 하고 나는 말을 멈췄다. 생리 전 증후군으로 감정이 예민해졌고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우정으로 마무리된 영화의 감흥으로 감정이 다운되어서 내가 듣는 이의 고려 없이 말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대화가 너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았다.
영화에서 여자 산부인과 의사가 ‘니가 그렇게 산 대가야!’라는 식으로 질책해서 화나서 뛰어나온 재희는 흥수에게 울면서 말한다.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냐고. 사람들은 자기가 도덕적 우위에 선 양 행동하며 오해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싼 사람 취급을 하며 자기의 폭력적인 언행, 프레임 씌우기를 정당화한다. 나는 그게 너무 싫다.
“전 남자 둘이 격렬하게 키스한 그 장면부터 너무 불쾌하고 불편하더라고요.” 하고 남자 2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요? 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가 말했다.
“아우 저도 그거 너무 싫었어요. 그 연기 한 사람들 얼마나 불쌍하던지. 으으 저라면 연기라도 절대 못했을 듯.” 하고 남자 1이 말했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좋고 내 앞에서도 그렇게 표현한 건 괜찮았는데 내가 동성애자라면 기분이 나빴을 것 같다. 내가 혹시 동성애자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성애자인 남자들은 저런 감정이 들 수 있겠다 싶긴 하다.
”동성애자들은 그러고 싶어도 손잡고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그런게 너무 안쓰러워요. “라고 내가 말했다. 영화에서 사회적인 시선,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좋아하는 사람도 놓치고 마음껏 사랑해 보지도 못한 흥수가 안쓰러웠다.
“전 동성애는 좀.. 그래도 좀 편하게 접근하게 영화를 잘 만든 것 같아요.” 하고 남자 2가 말했다. 남자 1도 동의했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시각이 현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 중 몇 명은 동성애 권리 문화 등 엄청난 옹호자들도 있지만 나도 동성애에 관해 관심이 없다.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헐리웃 영상에 나오는 것 같은 누가 봐도 게이 같은 여자 같은 손짓과 말투를 하는 교환학생들이 몇 명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엄마 나 미국이나 프랑스에 가서 살아야 할 것 같아.‘ 하고 소파에 누워 엄마에게 푸념하는 흥수의 말이 생각난다. 거기서라면 흥수가 조금 더 자신 있고 자유롭게 연인과 손잡고 다닐 수 있을 텐데.
나를 포함한 한국 사회는 주류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수용성, 포용성이 유럽?에 비해 아주 낮다. 예를 들면 최근에 영국에 대해 공부할 일이 있었는데, 영국의 공직 사회는 우리로 치면 5급 공채 합격 공무원 중 장애인 비율이 10%가 훌쩍 넘는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확실히 선진국이구나를 느꼈다.
한국의 공직사회는 장애인 법정 의무고용률 3.8%도 못 채워서 부처별로 몇 십억 이상 부담금을 내고 있다는 기사가 국정감사 기간만 되면 쏟아진다. 한국의 정부부처, 공공기관 직원들은 장애인과 같이 일하기 싫어한다. 어떻게든 같이 일하지 않는 방향으로 때우려고 하는 게 현실이다. 엘리트 장애인들이 고위 공직으로 나아가는 영국은 우리처럼 의무 고용을 강제하지도 않는데 공공, 민간 모두 장애인 취업률이 높고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는 비율이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높다. 내가 느낀 건, 아무리 제도와 정책이 좋아 봤자 사회의 수용성, 시민의식, 다양성과 포용성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남성과 영화를 보니 서울대입구역에서 같이 영화를 봤던 남사친이 떠올랐다. 중요한 시험이 끝난 뒤에 그동안 못 봤을 테니 통신사 할인으로 영화 티켓을 주겠다 했는데 영화도 혼자 보라는 거냐고 같이 좀 봐주면 안 되냐고 볼멘소리하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같이 봐주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 끝나고 밤에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수다도 떨고 날이 시원해서 딱 요즘 같았던 게 생각난다. 그때의 대화랄지 어떤 영화였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계속 웃음이 가득했던 명랑한, 흐릿한 영상으로 떠오른다.
“오빠 제발 좀 떨어져서 걸으면 안돼? 혹시나 나에게 관심있는 사람들이 남자친구로 오해할까봐 걱정되는데.” 하고 장난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