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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를 싫어하는 p에게 극도의 자율성이 주어질 때

by 모네

이런 질문이 있었다. 상사가 굉장히 구체적으로 업무를 시키는 것과 벙벙-하게 크게 던져 주고 알아서 해라, 둘 중에 어떤 업무 스타일이 좋은가? 나는 벙벙-하게 주고 알아서 하라는 쪽이었는데 전자에 손을 드는 사람도 꽤 있었고 오히려 약간 더 많았다.


굵직하게 주고 알아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서 이것저것 추가해 나의 색을 반영해서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고 전임자들이 했던 것과 차별성이 있는 새로운 완성을 내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향으로 기획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나의 한 끗을 담을지는 시작부터 내가 주도적으로 혼자 생각할 때 종합적으로 완성도 있는 생각이 구석구석 닿기가 쉽다. 윗사람이나 상위 기관의 생각을 그냥 받아 적는 수준이거나 나의 기획에 크게 관여하기 시작하면 단순 취합자만 되고 나는 부속품처럼 느껴져서 흥미를 잃는다.


통제받고 간섭받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나는 피드백을 받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의견 공유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너무 그 이슈에 몰입하다 보면 늪에 빠지기도 하고 또 집단지성의 힘이 있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중간중간 관리자나 동료에게 피드백을 요청하는데 비판적일수록 좋다. 나중에 고치려면 더 어렵다. 그래서 관리자가 나에게 큰 덩이를 맡기고도 중간보고를 자주 하는 사람이어서 안심을 한다. 방향을 고쳐주기도 하고, 노하우를 공유해 주고 나 혼자는 생각이 막히던 것을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관리자의 능력과 역할, 태도가 중요하다. 뭘 하든 맘에 들어하지 않고 다 자기 형식과 내용대로 바꾸어야 직성이 풀려서 다 다시 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궁합이 중요하다.



대학원생에게는 극도의 자율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학교가 요구하는 건 졸업 논문을 제출하는 것, 논문 제출 전 예비 심사를 받는 것, 그전에 논문제출을 위한 자격시험에 통과할 것, 그 과정에서 논문심사 신청도 하고 논문심사비도 내는 등 단계별 신청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 학기라 논문 지도 수업을 신청했는데 뭐 논문 작성이 얼마나 됐나 주기적으로 교수님이 점검하거나 점검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혼자서 쓰다가 중간에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메일로 물어보거나 정 모르겠으면 약속을 잡고 찾아가면 된다. 그래서 내가 잘하고 있나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많긴 하다.


그러니 몇 달을 통으로 스스로 계획하고 이때쯤은 이 정도가 되어있어야 해, 하고 스스로 진행 상황을 통제를 해야 한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공부하기도 싫고 늘어지고 누워있고만 싶은 날이 있는데(이런 날이 너무 여러 날)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몰려들 때가 많다. 특히 선행연구를 읽고 프로포절을 작성하는 이번 방학에는 처음엔 시간이 너무 적어 괜히 불안했는데 점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니 시간이 여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늘어졌다. 효율적이진 못하다. 하루에 빡-해서 끝내도 될 것 여러 날 늘어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비효율성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하루 3시간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으로 삼고 그 외 시간은 완전히 죄책감 없이 보내기로. 얼른 끝내고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누워 있거나 라이브 바를 가든지 뭐! 하루에 몰아서 하겠다고, 혹은 죄책감에 의미 없이 앉아만 있다가 딴짓하며 오히려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면 이도저도 아니고 시간만 버린 셈이 된다.



p들을 보면 프리하게 살고 뭐 늦으면 어때, 시간개념도 딱히 없이 살 것 같은데 의외로 약속시간, 기한을 잘 지키고 공항에도 3시간도 전에 여유 있게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tp여서 그런 것 같은 게 우리는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해서 자신을 통제한다. 스스로 게으르고 준비를 안 하고 다닐 것을 알기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 시간이라도 여유 있게 다니는 것이다. 공적으로 지켜야 하는 시간과 약속은 내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나를 맞추기 위해 여유를 가진다.


약속을 하면 거의 지켜야 하는 스타일이어서 약속을 잘 안 만든다. 나는 두루뭉술하게 그때 가서 보자, 그날 컨디션 봐서 보자, 이런 게 좋은데 날짜가 고정되면 좀 숨이 막힌다. 그때 더 자고 싶을 수도 있고 생리통이나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고 나가기 귀찮은 날도 있는데 거절하기가 뭐 한 게 그 사람은 그날 나의 약속으로 다른 약속을 잡거나 계획을 못하게 된 것이면 미안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 같다. 반대로 나는 주말 계획을 안 하니까 기회비용이 없고 약속이 취소되어도 그냥 평소의 일상을 보내면 되니까 그래? 응. 하고 만다. 이렇게 집순이가 되는가 보다.


나도 항상 기한과 일정을 미리 앱에 기록을 한다. 이건 최소한의 노력이고, p들이 계획을 하게 되는 건 가능한 게으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아, 예비심사가 이때면 나는 아 이 날까지만 교수님께 검토를 받으면 되겠구나, 그럼 언제까지만 완성해 놓으면 되겠구나, 최소한 이때부터는 몰입해서 시작해야겠다 하는 날짜를 후다닥 정하면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나의 덩어리 날짜가 생기고 그때부터는 그냥 그 순간 순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다. 어디에 구애받지 않고 확보되어 흘러가는 나만의 시간.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학교에 두시쯤 도착해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7시간 넘게 집중해서 공부를 했다. 시간이 어느새 너무 빨리 갔다. 집중력을 측정하는 기계로 재면 엄청 높이 나왔을 거다. 오늘까지는 해야 하겠다, 하는 목표가 생기면 늘어지지 않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저녁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 자리가 널럴해 앉을 수 있어 좋았다. 직장인들처럼 9-6로 출근해 앉아있으라고 하면 기상부터 오가는 지옥철, 사무실 안에 갇혀있다는 게 스트레스였을텐데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작업을 하니 너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작업한 분량과 결과도 마음에 들었다.


극도의 자율성을 가진 직업은 연구자 외에도 재택근무 사기업, 자영업, 프리랜서, 예술가 정도일까. 게으르고 유동적인걸 좋아하는 사람도 원하는 성과를 내야 하니 더 강박증적이 되려나. 원하는 성과와 나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또 달라지겠지만. 그러한 직업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그려지면 달성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율성을 즐기게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랑 맞는 직업일수도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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