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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Aug 23. 2024

오독

 간결을 간절이라 잘못 읽었다. 그 분의 간결함은 온데 간데 없어 졌고 내 안의 간절만 남았다. 오늘 아침엔 과향을 가향이라 잘못 불렀다. 뜻이 어느정도는 일치하나 직원분은 큰 차이가 있다 하셨다. 버블검 맛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내 기분은 한층 업 됐으나 풍선을 불지는 못하였다.


 모두가 간절하다. 그리고 많이들 장황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간절과 간결보단 간절과 장황이 더욱 더 연이 닿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간절함이 없이 과향 커피를 여러명과 나누었을 때는, 내 말을 간결하고도 운율감 있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간절함에 뒤덮인 채로 혼자 카페에서 노트북을 만지작 거릴 때면 나는 언제나 장황히 중언부언해 내 신세를 마치 내가 의도치 않은 것마냥 정당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간결하고 싶다. 누군가는 나에게 시를 쓰는 것을 추천했다. 당신은 내가 2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서 일부로 문장을 늘여쓴 것을 아는가? 그것을 모르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내 맘을 모르는 것과 인과 관계를 같이 한다. 내가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내 연대기는 마치 실패한 자의 비망록 같다. 한마디로 쓰잘데기 없는 것들의 나열. 장황함의 향연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제목을 오독으로 지은 이유는 내가 간결을 간절이라 오독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산문성이란 타투를 했다. 최근에는 내 삶 마저도 비극의 주인공이 갈수록 일취월장을 하는 느낌이라 내 타투가 의도치않게 어울리는 것만 같다. 오독한 이유는 뻔하다. 내가 보고싶은 것을 보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은 간결과는 거리가 멀고, 실천 없는 간절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활계획표를 적는 사람이 아니다. "부끄럼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처럼 내 자신의 생활 기록부를 적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과향을 가향이라 치부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내 가치는 천연 과일에서 인공 감미료쯤으로 "무분별한 낙하"를 했다. 나는 점점 편의점, 마트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몸서리만 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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