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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하다 Mar 25. 2019

어느 '수포자'의 일기

수학 못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수포자'(수학 포기자)다. '사람은 수학을 잘해야 성공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엄마 덕분에 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수학과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수능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은 게 수리영역이었지만...)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자몽이는 수학을 포기한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크게 받은 엄마는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학원을 데리고 다녔지만, 수학에 관심이 없었던 학생을 보며 선생님들이 먼저 포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최후의 보루처럼 선택한 것이 과외.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단 둘이 있다는 상황 자체를 어색했던 나는 과외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고등학생인 여자 아이에게 중학교 난이도의 수학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면서 수능 때 점수를 올려줄 수 있는' 과외 선생님을 찾기 위해 엄마는 동네 사랑방을 돌아다니며 유명 강사를 찾기 시작했고, 몇몇 선생님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지인을 통해 우리 집에 찾아온, 40살 정도 돼 보이는 선생님은 수학 과외 경력만 10년 즈음되었고 수포자들을 수학 전공자의 길로 인도한 베테랑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우선 밉게 보는 이상한 성격 탓에 그 선생님은 첫인상에서 탈락. 그 후로 수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거쳐갔지만, 과외비만 올라갈 뿐 성적은 도통 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결과는 수능 망침. 수능을 망치고, 내 인생도 망친 것 같지만 공식적으로 수학과 이별할 수 있게 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 (집에 돌아와 수학 문제집을 찢어버릴 때의 그 기쁨이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렇게 수학에 미쳤었나 싶다. '수학'이라는 생명체의 멱살을 쥔 채 몇 년을 끙끙... (솔직히 지금도 수학의 멱살을 확실히 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잘 사냐고? 당연!  물론, 한 번씩 수포자가 감당하기에 어려운 순간이 닥치긴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수포자임을 당당하게 밝히자! 수포자로서 세상과 부딪히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이 세상에 직업이 몇 개인가? 암산 좀 안되면 어떻고, 곱하기 나누기 좀 틀리면 어떤가. 내 주변에 있는 이 사람들도 어차피 다 모른다.


오늘도 수많은 수학학원 간판 밑을 지나가며 생각한다. 수포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길.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앞두고 당당히 '저 이거 몰라요!'를 외칠 수 있길! 수학 못해도 괜찮게 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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