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쌍하게도, 불쌍하게도. (2024)

낙엽, 나목

by 김민주

불쌍하게도, 불쌍하게도. (2024)


바람이 아주 조금 시원해졌다 싶던 참에 갑자기 겨울과 같이 추워졌습니다. 지난밤에 후드티 하나 덜렁 입고 나섰다가 호되게 혼쭐이 나고, 오늘은 두 겹 세 겹 껴입었더니 오히려 더워서 힘들더랍니다. 그렇게 갑자기 이런 추운 날을 만나는 거예요. 나는 아직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어떤 것은 내 마음과 다르게 떠나가고, 어떤 것은 내 마음과 다르게 찾아오지요. 올해엔 아직 길가의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노랗게 물드는 것을 채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진다니요. 은행나무가 야속하다 해야 할지, 이 날씨를 야속하다 해야 할지, 그런 걸 보채는 내가 야속하다 해야 할지 통 모르겠네요.


지나간 낙엽에는 어떤 걸 넣어놨더라. 이제는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카페의 2층 창가에 앉아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을 보던 것이 꼭 1년이 지났어요. 어렴풋이 그날의 그때에는 그 낙엽이 참 서글프고 마음 아팠던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낙엽을 밟았고, 바스락 바스락 흩어져 바람 사이로 날아가는 그것들을 그저 흘러가게 두었지요. 그랬더니 이제는 낙엽 아래에 무엇을 두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 하고. 바스락, 바스락, 그 소리만 떠올리게 된 겁니다. 그렇지, 내가 밟은 낙엽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지, 하면서요.

얼마전, 버스에서 당신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당신을 따라 내렸어요. 그것 참 바보같이. 당신과 하나씩 만들어 놓았던 잎사귀들은 진작에 흩어져 저 멀리 날아갔을텐데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겨울 바람과 같이 싸늘하게 식은 당신의 발자국 아래에서 짓밟혔을텐데도. 나는 이제 잘 떠오르지도 않는 마음들에 괜히 미련이라는 들뜬 마음을 덮어 씌워 놓은 걸지도요. 어쩌면 당신의 발 아래에서 짓이겨졌을 그 낙엽, 그 낙엽이 안쓰러웠을 뿐 아니었을까. 나도 떨어진 나뭇잎들을 보면 괜히 밟아보곤 하면서도요.


물드는 것도 보여주지 않은 은행나무들을 괜히 탓하게 되어요. 겨울이 오는 줄도 몰랐잖아, 그래서 어제 겨우 후드티 한 장만 입고 찬 바람 사이를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잖아, 하면서. 실은 고작 은행나무들에게 기대에서 지나가는 계절을 어림 잡아 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참 어리석을지도 모르는데. 혹은 겨울이 오기 싫어서 아직 노랗지도 않은 것들을 보면서 추운 날이 오려면 멀었겠지, 넘겨 짚은 내 잘못일지도요. 그런데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뭇잎들이 노랗게 바래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난 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스락 바스락 날려버려야 하려나. 왜 내가 지난 해에 밟았던 죽은 나뭇잎들을 따라서 당신이 흩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보내지 못한 나뭇잎이 남았나. 아마도 그렇겠지요. 노랗지도 못하게 된 나뭇잎들이 불쌍하잖아요.


지나간 낙엽에 내가 애써 넣어놓은 것들은 바스락, 바스락, 거 참 소란스럽게 흩어지더만. 내가 애써 흩어지라고 팔을 휘젓는 것들은 왜 소리도 없이 형체도 없이 남아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 나오는 걸까. 바스락, 하면서 티라도 내주면 내가 당신을 따라 내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텐데. 어여쁘게 익은 은행나뭇잎이 보고파. 그럴 수 있다면 가을이 왔구나, 곧 겨울이 오고 모든 것이 떠나갈 것이라는 걸 어설프게라도 짐작할 수 있을텐데요. 내 손으로 주운 고운 나뭇잎 하나를 내가 좋아하는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가, 다음 해의 은행나무가 익으면 그 사이에 살포시 얹어두고, 잘 가,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올해에는 노란 은행나무를 보지 못 해서 당신을 괜히 생각하나봐요. 익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불쌍해서 말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