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나목
불쌍하게도, 불쌍하게도. (2024)
바람이 아주 조금 시원해졌다 싶던 참에 갑자기 겨울과 같이 추워졌습니다. 지난밤에 후드티 하나 덜렁 입고 나섰다가 호되게 혼쭐이 나고, 오늘은 두 겹 세 겹 껴입었더니 오히려 더워서 힘들더랍니다. 그렇게 갑자기 이런 추운 날을 만나는 거예요. 나는 아직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어떤 것은 내 마음과 다르게 떠나가고, 어떤 것은 내 마음과 다르게 찾아오지요. 올해엔 아직 길가의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노랗게 물드는 것을 채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진다니요. 은행나무가 야속하다 해야 할지, 이 날씨를 야속하다 해야 할지, 그런 걸 보채는 내가 야속하다 해야 할지 통 모르겠네요.
지나간 낙엽에는 어떤 걸 넣어놨더라. 이제는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카페의 2층 창가에 앉아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을 보던 것이 꼭 1년이 지났어요. 어렴풋이 그날의 그때에는 그 낙엽이 참 서글프고 마음 아팠던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낙엽을 밟았고, 바스락 바스락 흩어져 바람 사이로 날아가는 그것들을 그저 흘러가게 두었지요. 그랬더니 이제는 낙엽 아래에 무엇을 두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 하고. 바스락, 바스락, 그 소리만 떠올리게 된 겁니다. 그렇지, 내가 밟은 낙엽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지, 하면서요.
얼마전, 버스에서 당신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당신을 따라 내렸어요. 그것 참 바보같이. 당신과 하나씩 만들어 놓았던 잎사귀들은 진작에 흩어져 저 멀리 날아갔을텐데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겨울 바람과 같이 싸늘하게 식은 당신의 발자국 아래에서 짓밟혔을텐데도. 나는 이제 잘 떠오르지도 않는 마음들에 괜히 미련이라는 들뜬 마음을 덮어 씌워 놓은 걸지도요. 어쩌면 당신의 발 아래에서 짓이겨졌을 그 낙엽, 그 낙엽이 안쓰러웠을 뿐 아니었을까. 나도 떨어진 나뭇잎들을 보면 괜히 밟아보곤 하면서도요.
물드는 것도 보여주지 않은 은행나무들을 괜히 탓하게 되어요. 겨울이 오는 줄도 몰랐잖아, 그래서 어제 겨우 후드티 한 장만 입고 찬 바람 사이를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잖아, 하면서. 실은 고작 은행나무들에게 기대에서 지나가는 계절을 어림 잡아 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참 어리석을지도 모르는데. 혹은 겨울이 오기 싫어서 아직 노랗지도 않은 것들을 보면서 추운 날이 오려면 멀었겠지, 넘겨 짚은 내 잘못일지도요. 그런데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뭇잎들이 노랗게 바래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난 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스락 바스락 날려버려야 하려나. 왜 내가 지난 해에 밟았던 죽은 나뭇잎들을 따라서 당신이 흩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보내지 못한 나뭇잎이 남았나. 아마도 그렇겠지요. 노랗지도 못하게 된 나뭇잎들이 불쌍하잖아요.
지나간 낙엽에 내가 애써 넣어놓은 것들은 바스락, 바스락, 거 참 소란스럽게 흩어지더만. 내가 애써 흩어지라고 팔을 휘젓는 것들은 왜 소리도 없이 형체도 없이 남아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 나오는 걸까. 바스락, 하면서 티라도 내주면 내가 당신을 따라 내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텐데. 어여쁘게 익은 은행나뭇잎이 보고파. 그럴 수 있다면 가을이 왔구나, 곧 겨울이 오고 모든 것이 떠나갈 것이라는 걸 어설프게라도 짐작할 수 있을텐데요. 내 손으로 주운 고운 나뭇잎 하나를 내가 좋아하는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가, 다음 해의 은행나무가 익으면 그 사이에 살포시 얹어두고, 잘 가,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올해에는 노란 은행나무를 보지 못 해서 당신을 괜히 생각하나봐요. 익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은행잎들이 불쌍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