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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Sep 08. 2019

그들에겐 비밀이 없다.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타인에게는 관계 지향적이고 친근한 태도로 접근하나, 타인은 본인에게 객관적이고 시스템 중심으로 대하기를 선호함.’


    나의 버크만 진단 결과의 일부다. 

빨강, 노랑, 초록, 그리고 파랑의 4가지 색으로 성향을 구분하여 개인의 관계나 업무적 강점부터 가능성, 보완 영역을 진단해준다는 커리어 패스 설정의 마스터키 같은 이 테스트는 회사 사업지원팀에서 진행한 개발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하루 동안 동료들과 대형 회의실에 모여 서로의 진단 결과를 공유하고 같은 성향의 사람끼리 그룹을 지어 대화를 나누었다. 프로그램 몇 주 전에 버크만 진단을 위한 온라인 설문에 참여하라는 메일을 받고서는 수백 가지나 되는 질문에 헉, 했었다. 아니 바빠 죽겠는데 이걸 언제 다 하라는 거지 싶은 마음이었다. 불만스럽게 앙다물었던 입은 어느새 집중하느라 오리처럼 뾰족 내밀게 되었지만. 


    설문은 흥미로웠다. 타인이 잘못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지 등의 질문을 교묘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번역체의 말투로 어색하게 선택을 요구했다. 평소 본인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타입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기에 그것과 동일한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결과의 일부가 바로 저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겠지만, 나에게는 선을 지켜주세요.'     




    뜨끔했다. 남들이 보기엔 언제나 밝고 친근한 사람이지만 그게 가면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다정하지만, 대체로 가식이니까.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기는 할 것이다. 이 그룹에서는 모습 1, 저 그룹에서는 모습 2, 그리고 어디에선가 모습 3. 어떤 이는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이렇지 않나, 하며 쉽게 넘겨버릴 수도 있었겠지. 다만, 손에 쥐어진 두터운 종이 뭉치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 것은 원래는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정했던 나의 모습을 알고 있고, 그것이 변하게 된 시점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 일을 배우고 사람을 겪느라 고생하던 신입 시절이었다. 이 년 터울의 선배는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힘들지, 하며 비타민 음료를 쓱 건네주거나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환기하던 사람이었다. 야근이 기본이고 칼퇴는 연례행사였던 시기에 그나마 참으며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선배를 비롯한 좋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사회 초년생,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나와 주변에 기댈 곳이 없던 천둥벌거숭이 신입 사원에게 그런 선배들은 마치 대학교에서 의지하고 멘토가 되어주던 동아리 선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천성은 어쩔 수 없어 원래도 물렀던 나는 주변 상황의 여파로 흐물흐물 해파리 같은 상태였다. 문자 그대로 톡 건드리면 눈물을 펑 쏟아낼 만큼 약해진 상태였다. 


    이렇게 구구절절 그 시절의 나를 표현하는 건 그래, 너도 그럴 만했지, 하는 자기 위로를 위해서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비타민 음료를 건네주던 그 선배를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며 회사에서 힘든 점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더랬다. 그리고 그 선배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옮겼고, 그 이후는 전형적으로 흘러갔다. 어리고 물정 모르는 신입 사원이 털어놓은 고민은 한 두 번의 술자리 안주로 소비되고 말았지만, 믿고 털어놨던 선배에게 배신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거라 여긴게 더 이상하지만.




    그들에겐 비밀이 없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얻은 교훈이다. 아침에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면서 ‘나 어제 A와 B 랑 지하철 같이 탔어. 둘이 퇴근 같이 하던데?’하면, 그 날 오후 사무실 반대편에서는 ‘A, B 결혼한다며?’가 되기 쉽다. 나의 고민도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장신구를 늘려가며 화려하게 휘젓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그 어떤 신뢰를 바탕으로 고민을 털어놓더라도, 비밀은 없다. 


    그걸 피부로 겪고 나니 말을 아끼는 것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나의 경우에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했다. 회사와 개인적인 친분을 명징하게 구분하는 것. 회사는 동아리가 아니다. 당연한 거지만, 그 시절에는 약간 구분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반성하는 기분으로 털어놓는다. 그렇기에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했다. 웃고, 친근하게 굴되 개인사는 나누지 않는다. 그게 나의 방법이었다. 친해졌다고 판단하면 속 깊은 얘기도 술술 풀어놓는 사람이 나여서, 회사 사람과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친구 되기 1단계인 개인사 나누기부터 일절 금하는 것이 좋았다. 


    덕분에 인사하는 사람만 많고 술 마시는 사람은 잘 없는 사람이 되긴 했지만, 비밀이 없는 이들의 비밀 아닌 비밀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것보단 썩 마음에 든다. 




    그 선배는 거리를 두고 지내는 아직까지도 종종 그 시절의 고민을 꺼내며 과거의 친분을 드러낸다. 여러 개의 가면을 보유한 현재의 나는 냉큼 웃으며 모르쇠 하지만, 속으로는 언짢기 그지없다.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올 법한 타인의 고민을 무기로 활용하는 이는 아주 무례하다는 일반적인 상식이 있건만, 그저 재미로 가지고 노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게 우스웠다. 허무맹랑 하지만 만약 그 시절의 내게 딱 한 마디만 해 줄 수 있다면,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회사에선 아무도 믿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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