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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Aug 29. 2020

만능의 단어, 그러게요

정면승부가 어렵다면 약간 비껴가도 좋지요.


“대체 왜 이런 건데? 어디서 잘못한 거야?”


이 말이 던져지는 순간 게임은 시작된다. ‘아무개 담당이 진행 일정을 놓쳤다나 봐요. 제 잘못 아니에요.’라고 진실되지만 다소 무책임해 보일 수 있는 대답을 하거나 혹은 ‘죄송합니다. 제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하는데.’라는 묵직하지만 자칫 모든 잘못을 홀라당 뒤집어쓸 대답을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어느 쪽이냐고? 당연 후자다.


회사생활 5년이면 풍월은 못 읊어도 팀장님 눈치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팀장님이 저런 말을 할 때는 누구의 ‘잘못’ 이냐는 요점이 아니다. 누가 ‘책임’ 질 건지가 그가 알고 싶은 것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회사에선 물이 엎질러졌으면 누군가 달려가서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닦아 내는 게 우선이다. 비록 뒤처리를 하게 된 사람이 쏟은 물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걸 ‘똥 치운다’고 표현한다.

산책 중 반려동물이 큰일을 보고 나면 주인이 배변 봉투에 똥을 담듯이, 소 우리에 가득 쌓인 똥을 삽으로 퍼내듯이 말이다.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이 된통 꼬여 이후 처리에 애를 먹는 담당에게 ‘홍길동이가 싼 똥 치우느라 고생이 많아.’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게 나름의 위로 같은 거였다. 그런들 치워야 할 똥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적어도 ‘네가 한 잘못이 아닌 걸 안다’는 의미를 담은 위로라고 하자.


나도 위로를 담은 어깨 툭툭를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누군가는 진실을 알아주는구나 싶어 감동했고, 아무리 회사여도 그 안의 인심은 팍팍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똥은 아무리 치워도 악취나 얼룩 같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라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반복해서 처리하다 보면 처음에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담당인 ‘나’만 남게 되기 일쑤였다.


말할 것이냐 일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늦은 저녁까지 회사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봤다. 애초에, 이 일이 시작되었던 그 시점에, 팀장님이 ‘어디서 잘못한 거야?’라고 물었을 때 무책임해 보일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약간 민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일은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을 테고, 난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 있지 않았겠지. 그럼, 왜 그렇게 못했을까? 그럴 사람이 못 되어서다. 그게 사실일지라도 평가와 평판을 주도하는 팀장님이 잘못을 논하는 자리에 다른 담당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건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럼 회사를 다니는 내내 이렇게 남의 똥을 치워야 하나 울적하게 고민하던 내게 J가 말했다.




“그럴 땐 ‘그러게요’라고 해.”


처음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그러게요’ 라니, 너무 뜬금없잖아. 그래서 몇 번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이거 왜 이런 거야? 어디서 잘못됐어?”

“아휴, 그러게요.”

“그 팀은 왜 그래? 일정 체크 안 했대?”

“그러게요. 일정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거 안 된대? 왜 안 되는데?”

“그러게요, 왜 안 됐지.”


너무 딱딱한 책 읽기의 ‘그러게요’가 아니라, 약간의 변주와 추임새만 넣었더니 어느 질문에든 착착 감기는 만능의 단어가 되는 게 아닌가. 특히, 뭔가 잘못되었을 때 어느 담당이든 맡겨 일을 처리하려는 뉘앙스에 아주 유용했다. 이런 걸 왜 이제야 알려주냐며 J와 한바탕 웃었다.




다음 턴부터 바로 실전에 들어갔다.

어물쩍 나에게 어느 팀의 과오인지를 물어오는 팀장님에게 ‘아유, 그러게요.’라고 대응하니 약간 당황한 모습으로 목표물을 바꿨다. 새로운 목표물에게 일을 넘기려 했으나 의사표현이 명확한 그녀답게 ‘이건 길동 씨가 한 거예요.’라고 말하자 팀장님은 결국 길동 씨를 찾아 떠났다. 이렇게 쉬운 것을 나는 왜 그토록 앓았던가.


회사에서 본인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라는 좋은 조언이 많다. 회사도 사람 간의 일이니 명확하되 뾰족하지 않게 둥글리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애초에 그 둥글리는 것조차 민망하거나, 또는 혹여라도 남에게 피해가 될까 주저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나처럼.


만능의 단어, 그러게요!

마음 편하자고 ‘일이야 하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작은 것을 하나씩 떠맡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되었다.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덧없이 잦은 야근으로 라이프 밸런스가 무너지거나. 그러니, 누군가의 똥을 치우게 될지도 모르는 애매한 상황에 놓일 것을 대비해 꾸준히 연습 중이다. 아유, 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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