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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7. 2020

<동백꽃 필 무렵>: 그의 마음은 사랑이었을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용식이 삐뚤게 바라보기

  2020년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고아에 미혼모로 칭찬이나 감사, 지지와는 거리가 먼 ‘박복’한 인생을 살았던 동백을 촌놈 용식이 순전하게 사랑하고 끊임없이 지지하며 결국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던 이 드라마는 시청자로부터 참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더불어 백상예술대상까지 수상하였으니 평단의 사랑도 얻은 셈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 사랑을 받았던 이유를 일일히 열거하자면 많은 점들이 나오겠지만, 주인공 '용식'의 캐릭터가 큰 몫을 했다는 것은 꽤나 분명한 것 같다. '직진 촌놈', 기존 드라마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동백을 지치지 않고 사랑해주는 캐릭터! 이런 캐릭터에 배우 강하늘씨의 힘까지 더해지니, "도깨비보다 더 판타지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그 이야기가 증명해주듯이, '용식'은 참으로 이상적이며 뭇 여성들의 로망을 촘촘히 채워주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궁금한 부분이 하나 생긴다. 용식은 왜 동백을 그토록 좋아했을까? 오랫동안 꿈꿔왔던 ‘서울 여자’라서? 동백이가 예뻐서? 드라마에 나와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렇게 갈음할 수도 있겠으나, 이번 글에서는 이 드라마를 조금 색다른 시선으로 해석해볼까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인정 욕구였을지도 몰라

 

심리학에는 '구원 환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구원 환상'이란, 곤경에 처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정도를 넘어, 그의 절망에 대한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심리를 말한다. 단순히 돕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서, 누군가의 인생에서 그의 유일한 삶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일종의 열망이 들어 있는 마음인 것이다.


 혹시, 용식은 바로 이 ‘구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인물 아니었을까? 박복하고 상처 많은 그 인생을 나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싶은, 결국에는 그 사람의 인생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고 싶은 그 마음이, 혹시 용식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아닐까.


 근거 없는 의심은 그저 추측일 뿐. 필자가 이런 의심을 하게 된 것은 용식이 동백을 대하는 태도에서다. “살면서 한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다”, “마을에서 내가 그냥 살던대로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라고 말하는 동백에게 용식은 꾸준히,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삶에 있는 긍정적인 면들을 이끌어내고 언제나 그녀의 편에 서겠노라고 선포하며 그녀의 자존감을 올려주려 노력한다. 또한 동백이 가진 상처가 하나씩 드러날수록 용식은 더욱더 그녀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대의 나약함을 볼수록 그에게 애착을 더 느끼는 것은  ‘구원 환상’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애인과의 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모습은 <동백꽃 필 무렵>에서 용식이 동백에게 내내 취하는 태도와 꽤나 맞닿아 있다고 보인다.


 더불어, 용식이 ‘구원 환상’을 지닌 인물일 수 있다는 의심은 용식의 직업과 연결지어봐도 꽤나 합리적이다. 타인을 구하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 환상을 가진 이들이 타인을 구하는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극중 용식의 직업은 ‘경찰’, 대표적으로 사람을 구해주는 일이다. 심지어 용식은 사람을 구하는 일에 앞뒤없이 달려들어 표창장 받던 청년으로 경찰에 특채로 들어간 것이니.. 그야말로 경찰이 된 동기와 원인 자체가 ‘사람을 구하는 일’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구원 환상’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마음이 아닌가 얼핏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구원 환상’은 사실 ‘누군가의 삶’이 중요하기보다는 ‘구원’ 그 자체, 즉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하는 행위에 더 초점이 향해 있는 마음이다. 즉, 타인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라기보단 자신이 그만큼 타인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타인의 삶을 구원할 정도로 인정 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드라마를 현실로 가져온다면

 

이를 바탕으로 <동백꽃 필 무렵>의 이야기 전개를 조금 다르게 상상해보자.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만약 용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백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다면? 동백이 계속해서 자신을 자책하며, 상처에서 벗어나는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쩌면 용식은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넌 왜 변화가 없어?”라고 동백을 타박할지도 모를 일이며, 동백 또한 “너조차도 내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넌 역시 나에게 기적이 아니었어”라고 체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결말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해피 엔딩이었다. 동백이 용식을 통하여서 상처를 회복하고 결국 서로 사랑하게 되는 아름다운 결말이었으니. 이는 드라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확률이 높다. 현실에서는 구원을 강요하다 지쳐버리는 이와 결국 구원을 찾지 못한 이로 끝을 맺게 되거나, 구원에 대한 집착이 상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백꽃 필 무렵>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 이 드라마가 흥행하며 동백 캐릭터는 공감을 얻고, 용식 캐릭터는 큰 인기를 얻었다. 극중 동백의 상황과는 다를 수 있지만 마음에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온전히 사랑받고 지지받았던 기억이 없는 사람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이가 필요한 사람들, 세상이 나에게만 박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 이 모든 이들을 동백을 구원하고 싶던 용식이 위로해주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동백꽃 필 무렵>의 인기는, 이렇게나 이 사회에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까? 드라마의 기획의도는 ‘될 수 있다’라며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드라마의 답변은 'Yes'였던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답변은 ‘No’에 더 가깝다. 빛과 같은 용식이가 실제로 등장할 가능성도 낮을 뿐더러, 빛인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자신의 이기심으로 구원자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기적’ 또한 꼭 <동백꽃 필 무렵> 정도의 구원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신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기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곁을 꼭 지켜주는 것. 그가 웃을 때 같이 웃으며, 울고 있을 때 같이 우는 것. 이 외로운 세상을 함께 걸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삶에 충분한 '기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이런 기적이었을까? 나는, 누군가의 삶에 기적이었을까.



*'구원환상'에 대한 내용은 정신의학신문 칼럼 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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