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교환학생 시절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과정들은 재미있었지만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서유럽의 지랄 맞은 날씨 탓에 꽤나 우울한 감정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 그 때 처음으로 내가 날씨에도 기분이 오락가락 영향을 받는 이토록 감정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거 같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감정이 왔다 갔다 할 때 마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못견뎌했다. 친구를 만난다던지 어디든지 떠나고 싶은 감정이 올라와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나는 막상 혼자 정처 없이 떠나게 되면 그림을 보러 가는 일을 택했다. 아마도 유럽에 있을 때의 나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고 국제 학생증은 여러 유럽 미술관을 거의 프리 패스로 다닐 수 있는 혜택을 주었기에 미술관 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다.
미술관에 가면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기에 딱 좋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기는 싫을 때 미술관에 가는 것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는 적당한 소음은 편안했다. 곳곳에 의자가 놓여있어서 멍 때리고 한참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적당한 온도와 조명은 아주 좋은 곳에서 명상을 하는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우울한 날엔 역시 그림이지. 그때서부터 혼자서 그림을 보러 가는 일은 템플스테이를 하듯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지금 내가 혼자 그림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때 느껴졌던 편안함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오고 서둘러 취직 준비를 하고, 회사에 입사 한 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한동안 멀어졌던 나의 미술관 생활은 회사생활에 치이고 지치고 지겨워질 무렵에 돼서야 되돌아왔다.
당시에 느꼈던 편안하면서도 낯선 공간이 그리워졌다. 세상 제일 힘든 게 인간관계라더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주 뼈저리게 사무치게 느끼는 중이다. 스트레스가 늘면서 혼자 있고는 싶은데 어디론가 기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피곤해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밖으로 나서는데 사람 많은 공간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아주 까다로운가 싶기도 하고). 그 때 생각난 공간이 바로 미술관이었다. 다시 찾은 미술관은 교양 있어 보이거나 정말 그림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심리적 도피처였다. 잠시 돈 안들이고 현실과 동 떨어진 공간에 놓이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한 곳. 매번 설레는 그림을 만나볼 수는 없지만 미술관이 주는 조용한 편안함이 좋아서 계속 방문하게 된다.
전후 관계야 어쨌든 다시금 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림을 보다보니 점차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좋아하는 그림이 늘어나다 보니 현실의 힘든 일들을 잠시나마 잊고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적당한 우울함에 외로운 건 싫지만 혼자 있고는 싶은 마음이 헛헛한 날, 미술관은 여러모로 참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