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글은 없어

덕후들이여, 깨어나라!

by 일상채색가 다림

태초에 먼저 그들이 있었다. 이름도 찬란한 ‘십대들의 우상.’ High Five of Teenagers. 줄여서 H.O.T. 알파벳 사이사이의 점이 중요했다. 점을 찍어 알파벳을 따로 부르지 않는 어른들을 요즘 말로(이 말도 요즘 말은 아닌 듯) 틀딱 취급을 했었다. 그들은 나의 10대 시절을 점령했다. 나를 조여 오는 수많은 외부 요인들로부터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를 강압적으로 관리하던 나의 부모께서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나 역시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음반이 발매되면 빠짐없이 CD와 테이프(카세트테이프 시절이라 CD도 사고 테이프도 사야 진정한 팬이 된 느낌이었다)를 사서 모았고, 어딜 가나 그들의 음악과 함께 했다. 그들의 존재, 그들의 음악은 나에게 한줄기 '빛'이자 유일한 '행복'이었고, '캔디'처럼 달콤했다.


그리고 10대 후반기, 내 인생에 야구도 있었다. 파란 유니폼을 입고 담장 밖으로 미친 듯이 공을 날려 보내던 타자, 라이언 킹. 복잡한 야구의 룰은 진입장벽이 다소 높았음에도 타고난 덕력 레벨이 만만찮았던 나는 가뿐히 진입장벽을 넘었다. 90년대 후반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성시원이는 그렇게 야덕이 되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승부 중 하나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진리를 성실하게 따른 경기였다. 9회 말에 터져 나온 동점 쓰리런 홈런과 연이어 터진 끝내기 승을 만든 백투백 홈런. 이보다 더 강한 뽕은 없었고 나는 그대로 야구에 빠져들었다. 나를 공놀이계로 이끈 홈런타자는 일본에 진출했고, 난 신고선수(현재는 육성선수라 부르는) 신화를 쓴 짱구 친구 맹구를 닮은 타자를 따라 서울 연고의 팀으로 팀 세탁을 감행한다. 이후 나는 치욕의 콩 역사와 몇 번의 우승을 경험하며 ‘그깟 공놀이’가 얼마나 한 사람의 인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잠시 또 다른 아이돌도 있었다. 멤버들이 초능력도 있댄다. 처음엔 이런 병맛은 뭔가 싶었지만, 원래 병맛이 중독되면 무서운 법. 그들의 병맛 세계관은 곧 전 세계를 씹어 삼켰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짧고 굵게 빠졌다가 띵호와 친구들이 자기네 나라로 가버리면서 내 덕질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이 놈이 나타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좋아한 아이돌 그룹에서 최애 멤버의 초능력이 괴력이었는데, 괴력은 요 꼬맹이가 더 강력했다. 모든 것이 예뻤고,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어 달 가량 내 핸드폰에는 미동도 없이 자는 신생아의 모습만 수천 장이 담겨 있었다. 매 순간이 경이로웠고, 그렇게 나는 자식의 덕후가 되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의 덕후다.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고, 뭘 해도 참 좋다. 내 새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뻤으면 좋겠고 잘 나갔으면 좋겠다. 모자란 부분은 그럴싸하게 포장해주고 싶고,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발 벗고 나서서 변호를 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좀 더 가까이 가고 싶다. 바로 이게 덕질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덕후의 세계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자식의 덕후가 된다.


누군가의 덕후가 된다는 것은 해볼 만한 경험이다. 덕후 개념이 한국에 들어올 때 어두운 부분을 많이 조명한 탓에 덕질의 세계는 뭔가 일반인, 즉 머글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막상 덕질을 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나에게 덕질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했는가에 상관없이 내 인생의 큰 활력소였다. 덕질의 대상과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일방적인 관계였고 적정 거리가 있었기에 나는 더 마음 편하게 애정을 쏟을 수 있었다. 매 순간 즐겁지는 않지만, 새 음원 발매 소식이 들리거나, 오늘 내가 응원하는 팀이 혹은 선수가 잘하는 날에는 잠시 내 인생의 고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때론 '내가 지금 숨은 쉬면서 일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그 정도 기쁨이면, 충분히 할만한 짓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 한 번쯤은 꼭 덕후가 되어보는 경험을 했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머글인 것처럼 살아가는 덕후들이여,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