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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튼 Feb 24. 2018

누나가 읽던 자기계발서

20171226

스물둘에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중고등부 학원에서 보조강사 알바를 했다. 학원 입구의 안내 데스크가 내 자리였다. 옆에는 내가 오기 전부터 데스크에서 일하던 누나가 있었다. 원장 선생님의 처제였던 누나는 학원의 재무상황을 비롯한 총괄적인 업무를 챙겼고, 나는 선생님들이 부탁하신 수업자료를 정리하거나 학생들의 시험지를 첨삭했다. 하지만 실제 데스크에서는 상황이 동시다발로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 일에는 따로 구분이 없었다. 수업 끝난 빈 강의실 칠판과 책걸상 정리, 수업교재 제본, 학부모 전화 상담, 방문 상담, 선생님들 도시락 심부름 등의 일들을,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했다. 최소 한 명은 데스크를 지키려 했지만 너무 바빠서 둘 다 자리를 비우면 교무실에 있던 수업 선생님이 나와서 데스크 자리를 채웠다.


수업이 시작하고 복도의 학생들이 사라지면 학원 데스크도 평화로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전화기가 언제 울릴지, 학부모님이 언제 찾아오실지, 교무실에서 데스크에 부탁할 일이 언제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모니터 안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건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종종 데스크에는 자기가 한가한 때를 잘 골라온 줄 알고 한참 수다를 즐기다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귀에는 모니터 안의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 데스크 입장에서 그들의 존재는 모니터에 조준했던 총구를 돌려 겨눠야 할 더 긴급한 표적일 뿐이다. 평화는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누나와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주말에 본 드라마라던가 하루 지나면 기억 안 날 얘기들을 나누었다. 누가 언제든 데스크를 방문할지 모르니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없었다. 시선은 모니터가 있는 정면을 바라보며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입술은 서로의 귀까지 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 만큼만 움직였다. 너무 재밌는 얘기여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유난히 학원 일에 많이 지쳤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데스크에 앉았으면서도 힘든 티를 숨기지 못했다.

내가 계속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누나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자기가 힘들 때 큰 힘이 된 책이라고 꼭 읽어보라며, 그 책을 읽고 자신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느 때보다 길게 얘기했다.   


그 책은 자기계발서였다. 표지에는 당신은 할 수 있다, 변화를 일으키자는 투의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긍정적 에너지가 너무 과해 보였다. 그런 책을 진지하게 소개하는 누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튼 누나한테는 걱정해줘서 고맙다, 좋은 책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그 후로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다. 기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뭐든 간에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하나도 아는 게 없다. 제 삶에서 저는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피해야 하나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좀 알려주세요. 나는 책 속에 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를 여러 권 주문했다. 며칠 후 택배를 받았다. 한 권, 한 권, 의심과 기대를 동시에 자아내는 제목들을 훑으며, 그때 그 누나 생각이 많이 났다.


당시 30대였던 누나는 학원 데스크에서 1년째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후 한두 시에 출근해 밤  열 시쯤이면 퇴근하는데 누나는 나보다 일찍 출근해서 다른 선생님들 수업이 끝나는 밤 열한 시, 열두 시까지 데스크를 지켰다. 키 크고 조숙한 남학생들이 짓궂은 말로 수작을 걸었고 누나는 그 장난을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아이들이 데스크에서 멀어지고 나면 그제야 '애들은 정말 못 말리겠어요'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대꾸를 해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헷갈리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꼭 그렇게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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