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척, 강한 척하느라 모나고 뾰족했던 흑역사시절의 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사실 ‘너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해 주는 것에서 모든 것은 시작한다’가 아닐까.
나 조차도 나를 예뻐해 주고, 응원해주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이제야 미안함이 싹튼다.
그 당시의 나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기 위해 애썼을 텐데, 누군가가 나에게 길을 알려줬더라면
서툰 사랑의 시간이 조금 더 짧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뿌리는 조부모님에게서 온 '내리사랑, 주는 사랑,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의 종류였을텐데 어린 시절의 나는 계속 그 사랑을 나만 독차지하고 싶었나 보다. 어떻게 보니 만족을 모르는 사랑을 원했다. 받을수록 더 많이 받길 바랐고, 인정받고 예쁨 받기를 원했다.
받는 사랑의 양에 집착하다 보니 깊이 볼 줄 몰랐다. 잘나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그런 물건들과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휩쓸려 다녔다. 잘 나가면 더 행복한 거 같았고, 그 이전에 성공한 삶으로 보였다. 그렇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었다.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원했다.
스스로 충분하다 여겼을지라도, 곁의 누군가가 나보다 더 잘난 거 같으면 힘들어졌던 내 마음 간장종지 시절. 그 당시의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아마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무엇을 가지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누군가 아니었을까. 그저 너는 너이기에 훌륭하다고.
꽤 오랜 방황의 시작은 독립했던 스무 살 때부터였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랑에 처음으로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매일이 정신없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외부에서 답을 찾아다녔고, 방향을 잃었고 홀로 외로웠다. 외롭다 보니 또 방향은 꼬여가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찾아다녔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못했던 내가 어떻게 나를 바라보게 되었을까.
처음엔 또 이상하게 바라봤지. 당시 유명하던 자기 계발 세미나, 대외활동, 강의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존감을 뿜뿜 채워갔는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게 독불장군으로 가는 길이 되어버렸다.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나의 방향은 너무 뾰족하게 날 서있어서 다가오는 이들에게 상처를 줬었다. 흑 아니면 백이었던 모난 시절, 나를 알아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스스로 끝까지 나를 안아주고 지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또 나를 알아간다는 핑계로 어깨를 으스대려 했던 건 아닐까 돌아본다. 강한 척하느라 모나고 뾰족해지고 흑역사가 따로 없었다.
누군가는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모난 돌이 되어 모르는 이들에게 오해를 사는 순간에도, 나의 뾰족한 행동이 자신을 찌르고 있었는데도 품어주려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지 못했던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용기 내서 나의 어린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고 노력할 수 있었다.
친구뿐 아니라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진짜 똥차들의 행진이었다. 만나는 날들도 다 짧았다. 처음엔 문제를 상대방에게 찾다가 이 패턴으로 사는 내가 문제였다. 연애에 대한 기준을 바꾸고, 시선을 바꾸고, 혼자서도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다 나의 민낯도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되었다. 아, 꾸밈없이 만나도 괜찮구나. 그렇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주변 사람들의 사랑 덕분에 나의 사랑은 다음 단계로 성숙해질 수 있었다.
긴 시간과 눈물로 배운 어린 사랑 덕분에 나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