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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Oct 05. 2019

스페이스 보이

"스페이스 보이" / 박형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스페이스 보이. 2018년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정유정, 도선우, 김근우(판타자 소설을 좀 봤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바람의 마도사를 썼던 그 김근우가 맞다!) 등 쟁쟁한 작가들을 배출해 낸 세계문학상인만큼 이제 세계문학상 타이틀은 문학계에서 상당히 높은 위상을 가진 타이틀이 되었다. 반쯤은 그 타이틀을 보고, 반쯤은 밀리의 서재에서 서비스를 하길래 읽어보게 된 스페이스 보이는 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없이 자유분방한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한국 소설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편한 반말의 대화체로 서술된다. '나'는 오디션을 거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ISS(국제 우주정거장)에서 2주간 머물며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켓이 발사되고 ISS에 도착한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학교 보건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 ISS는 온데간데없다. 밖으로 나가자 펼쳐진 학교 운동장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하늘이 한 선을 기준으로 뭉텅 잘려나가 있다. 그 위는 암흑뿐. 그런 '나' 옆에 갑자기 나타난 칼 라거펠트.


"여기는 우주 맞아."


그는 자신이 우주인이라고 말하며 우리들은 지구인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고 자신의 모습도, 이 학교와 주변의 풍경도 모두 너의 기억을 재현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칼 라거펠트(모습을 한 우주인)는 얌전히 이 세계에서 지내다 지구로 돌아가면 무엇이든 네 소원을 하나 이뤄주겠다고 말하는데 그 소원의 범위는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인의 기술만큼이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로또번호, 세계적인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는 것,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 등등. '나'는 자신의 기억이 재현된 이 세계를 탐험하다(별의별 이상한 게 다 있다. 펄펄 끓는 피넛버터 늪이라던가, 기타 피크가 달린 나무라던가, 전자 기타를 칠수록 풍성해지는 전기숲이라던가.) 이 세계가 자신의 뇌 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이 곳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소원을 이뤄주겠다는 칼 라거펠트에게 '나'는 말한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내 기억을 지우지 말 것, 10월 28일에 폭우나 한 번 쏟아지게 해 줄 것.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의 절반은 우주에서의 이야기, 뒤의 절반은 지구에서의 이야기다. 앞에서 말했듯 우주에서의 이야기는 상상과 환상이 뚝뚝 흘러넘친다. 읽기만 해도 기분이 둥둥 뜨는 상상의 산물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뇌 속이라는 설정도 좋았다. 뇌 속 신경의 모습과 우주의 모습이 비슷한 모양이고, 결국 우리가 사는 우주가 누군가의 뇌 속이 아닐까?라는 흥미진진한 상상을 세련되게 보여준다.


'나'는 지구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우주로 왔지만 결국 떠날 때는 칼 라거펠트에게 어떤 기억도 지우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잊히지 않는 기억은 잔인할 텐데?라는 칼 라거펠트의 말에 지구로 돌아가 봐야 그럴지 아닐지 알 것 같다는 '나'의 대답은 얼핏 보면 우주에서의 뇌 속 탐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가 우주로 떠나며 지우고 싶었던 그 기억에 대한 대답이다. 결국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다 잊었다고 홀로 애써 머리를 흔들어 봤자, 정면으로 바라보고 씹어 삼켜 소화시키지 않은 기억은 언젠가 불쑥 익숙한 향기 하나에 튀어나오게 되는 법이다.


'나'가 지구로 돌아온 이후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주에서의 분위기와 정반대다. '나'는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한국의 영웅이 된다. 인터뷰, 방송 출연, 광고, 출판 제의 등등이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는 모든 연예인을 뛰어넘은 셀럽이 된다. 소속사가 생기고 TV만 틀면 '나'의 얼굴이 나오고 일거수일투족이 기사거리가 되고 로또 번호는 필요도 없을 만큼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모든 짓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성실하게 임한다. 끝없는 운동, 식단 조절, 경락 마사지, 보톡스와 필러를 통해 몸매와 얼굴을 만들고, 가짜 집에서 처음 보는 스탠더드 푸들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고, 이슈를 위해 애인이 있는 여자 연예인 도지은과 합의 하에 연애 스캔들을 낸다. 그리고 우주로 떠나며 지우고 싶었던 기억의 주인공 혜주를 만난다. 결혼을 앞둔 혜주에게 '나'는 말한다. 이제 내게 돌아오라고. 이제 나는 네가 결혼할 그 남자보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몸도 더 좋다고. 지우고 싶었던 너와의 기억이 사실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다고. 혜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10월 28일, 혜주가 오픈 웨딩카를 타고 달리고 있을 그 날 폭우가 쏟아진다.


지구에서 '나'가 겪는 이야기는 우주에서와 달리 현실적이다. 인기, 유명세가 곧 돈이 되는 지구에서 잘생기고 키 큰 우주 비행사는 어떤 인물보다도 탐스러운 연예계의 블루칩이고 '나'는 순순히 그 순리에 따른다. 인터뷰는 쓰여 있는 가짜 대본에 충실하게 따르고 대필 작가가 써 준 책을 '나'의 이름으로 출판하고 소속사 간의 합의 하에 서로의 이슈 메이킹을 위해 도지은과 가짜 열애 기사를 낸다. 보여주기 위한 가짜 '나'를 만드는 것이다. 대중은 가짜에 열광하고 '나'는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하루에 3시간도 못 자고 밖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 하고 진짜 '나'를 드러내지 않는 대가로. 하지만 혜주는 가짜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비단 연예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온갖 SNS가 판치는 현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가짜 자신을 만든다. 게시물을 보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나, 좋아요를 눌러줄 만한 나,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나를 꼼꼼하게 선별해서 전시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꽉 눌러 짜서 멋있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뽑아내는 것이다. SNS는 자랑의 전시회장이 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시험에 합격한 순간, 고대하던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성취한 순간을 자랑하고 싶고 그것은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SNS라는 최적의 시스템을 만나 한없이 증폭되면 과열되기 마련이다. 멋있고 아름답고 부러운 것들이 넘쳐나는 SNS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가짜 자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지구에서 '나'가 겪는 이야기는 가짜 자신, 가면을 쓴 자신이 반쯤 필수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비웃는다. 가짜 '나'를 만들고 가짜 삶을 살면서도 그 모든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나'를 통해서.


스페이스 보이라는 제목만 보고는 흥미진진한 SF 소설을 상상했건만 이 책은 내 섣부른 기대를 철저히 깨부쉈다. 우주 이야기로 독자를 살살 낚아놓고 뒤에서는 지금의 우리를 아프게 꼬집는다. 아직도 얼얼하긴 하지만(SNS를 켤 때마다 괜히 찔린다.) 꼬집힐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일기라는 형식과 건방지기까지 한 대화체는 신선하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기분 좋게 찜찜한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스페이스 보이와 함께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원래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건 즐겁기 마련이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래요, 이 엿 같은 지구를 돌아가게 하는 건 사랑이죠."

"아니, 지구를 돌아가게 하는 건 지구 중심의 자기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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