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숲사진가 Nov 03. 2022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위를 걷듯이

다른 세상으로부터 받은 첫 연락

뜻밖의 마주침. 그리고 기회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에 나만이 갖는 몇 가지 강점이라고 믿는 것들이 있다. 일례로 이야기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잘 끌어낼 수 있다거나, 긴장을 금방 풀어 내가 원하는 페이스대로 촬영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것 등이 그런 것들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사진보다도 중요한 차별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이다. 보급형 카메라의 빠른 확산과 스마트폰 카메라들의 성장세 등에 힘입어 이제 '사진 좀 찍는다'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인물 사진 하는 사람들이 웬만하면은 다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잘 산출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래서 대숲사진가를 하면서 나 스스로의 사진도 많이 늘었지만 그 보다 앞서 '사람을 대하는 스킬'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이 가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에 보다 큰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으며 덕분에 지금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New world


2017년의 초짜였던 시절을 조금씩 벗어나, 2018년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생각할 만큼 촬영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10,000 시간의 법칙이라는 한 가설에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야말로 흠뻑 사진을 뒤집어써서 하던 시절의 대숲사진가였다. 그 덕에 사진과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 조금씩은 늘어간다는 막연하고 둥둥 떠있는 듯한 기분을 조금씩 가져갈 때쯤에 율리아에게 처음으로 DM을 받게 되었다. 율리아가 대숲사진가를 알게 된 경로도 정말 묘한 그것이었는데, 일전에 먼저 촬영을 다녀간 사람의 동생분이 대숲사진가와의 개인 작업을 위해 그다음 대숲사진가를 찾았었고, 그 동생분의 친구가 율리아였다. 무려 두 다리를 건너온 것이다.


그때의 대숲사진가는 처음 사진을 본격 뛰어들었던, 고향인 모교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물론 모교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대숲사진가라는 이름을 조금은 더 알릴 기회도 많았고 좋은 분들과 많은 훌륭한 작업들을 했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과 무대를 원하던 시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기회가 닿았다. 내가 머물렀고, 쉽게 떠날 수도 없었던 남산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부터 온 첫 연락이었다. 대숲사진가에게 찾아왔던 첫 번째 기회였다.


처음으로 찾는 사람과 작업을 할 경우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나는, 그 사람의 기존 작업물 (있을 경우)이나 다른 사진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새롭게 찾아온 귀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찬찬히 율리아의 이미지와 분위기 등을 나름대로 파악을 해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처음 본 율리아는 색칠하지 않은 굉장히 넓은 도화지 같은 캐릭터였다. 그 여백의 흰색 자체로도 매우 잘 어울렸고, 기존에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도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 보이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역시 차분함보다는 특유의 밝고 통통거리는 기분을 대화 상대에게 선사한다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난 흰색 빈 도화지라면, 그 도화지를 흰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동시에 밝음과 화사함으로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촬영의 결과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이 날은 마치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출근길을 떠나, 마지막 남은 지하철 빈자리에 앉아 편하게 출근을 한 후, 가장 좋아하는 메뉴로 점심 메뉴를 먹고, 퇴근 시간에 칼퇴에 성공해서 한강에 걸리는 석양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 여정과도 같은 흠잡을 구석이 없던 과정과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이 촬영에 관한 연락을 받은 시기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하지만 맑고 따뜻한 이미지의 사람을 겨울철 바람과 추위가 날아와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곳에 이런 좋은 기회를 사용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대숲사진가는 기존에 하던 방법과는 다른 무언가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서 떠올려낸 것이 '계절의 영향력에 무감해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계절을 역행하는 의상과 연출이었다. 겨울을 유난히도 싫어하던 나의 의지와, 쉽게 소모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단 욕구가 함께 교차한 이유도 컸다. 이런 찰나에 서울 식물원이 막 개장하면서 시범 운영 기간이었던 점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기연이었다. 그렇게 따스한 햇빛이 푸른 하늘을 투영한 유리창과, 푸르름들과 어우러지는 배경 위에 순백의 첫인상 그 이미지였던 그대로의 율리아를 불러낼 수 있었다.


첫 촬영이었던 이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율리아는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까지도 굉장히 긴장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사실 그것이 응당 카메라 뷰파인더 뒤쪽에 서있는 내가 해야 할 역할임에도 오히려 역으로 촬영자가 이것을 받는 위치가 되면 굉장히 좋다는 감정만 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감사하고,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뭉치게 된다. 오히려 내가 그날의 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지속적인 부족함에 대한 질책 같은 것이다. 모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촬영 현장에서 촬영자 시점에서만 갖게 되는 묘한 감정들의 복합체였다.


금방 걷어낸 긴장감의 증발 속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A컷이라고 분류하는 작업이 무의미할 정도의 많은 사진들이 나왔다. 사진은 푸르르고 청초했으며, 내가 가장 다루기 좋아하고 자신 있는 초록과 파랑의 협주곡이 크나큰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율리아라는 거대한 흰 도화지 위에서 울려 퍼져나갔다. 모험보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안배로 모든 걸 해냈다고도 꼬집어낼 수 있지만, 그 계산도 날카롭고 빈틈없이 해낸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놓치기 싫었던 기회를 '그래 이 정도면 잘 살렸지'라고 혼자 너스레 떨며 말할 수 있었음에 기뻤던 기억으로 회상한다.



이 날의 솔직한 심정은 사실 '좋은 작업 한번'이라는 사실만으로 기뻤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것이 대숲사진가에게 굉장히 중요하고도 크나큰 분기점이었던 2018년의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위에 처음으로 나의 발자국 하나를 남긴 날이었지만 그 눈밭을 걸어가며 내 눈앞에 어떠한 광경이 펼쳐질지는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않은 채 그날의 작업 한 건만을 자축했다.


이 이후의 율리아와 대숲사진가는 꽤 많은 작업을 함께 했다. 지속적 관계로 동행하게 된 또 한 갈래의 감사한 인연이었다. 오래 함께 했지만 또 넓게 나눈 이야기 대비 깊은 이야기는 많이 나누어 볼 기회가 없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날의 첫 촬영이 어땠을지에 대한 궁금함은 지금의 나조차도 궁금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시간이 한 참이나 흘러 멀리 뒤돌아 보아야만 하는 지금엔 그리 중요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만, 푸른빛과 맑은 날에 조금 더 함께 밝은 파장을 낼 수 있었고, 한번 더 하늘과 나무를 올려다보며 그 순간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던 시절에 함께 동행했음에 감사 인사를 한번 더 건네고 싶을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길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