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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Oct 24. 2022

그 길에서

그 시점에 갖는 의미 자체가 곧 촬영의 전부가 되는 것

가까움을 넘어 동경하는 친구가 있는가


대숲사진가라는 타이틀이 생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프로젝트가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큰 조각들을 하나씩 채워준 존재들이 있다. 그 조각 하나하나의 존재들을 늘 거듭 기억하고 감사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 그 자체, 혹은 그들이 나에게 행했던 일들이 큰 조각이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응, 그랬다고?"라는 반응도 많이 보곤 했지만 그들이 보태어준 모든 순간들은 대숲사진가의 마음 구석구석 한켠에 모두 제각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도리는 그런 맥락에서 꽤 크고도 많은 것들을 대숲사진가에게 주었다. 가장 처음의 의욕으로만 달려들던 나에게 도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작업을 진행해야 모델 시점에서 마음에 드는가'를 처음으로 직접 하나하나 내게 언급을 해주었었다. 일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목이 길어 보이려면 승모근 쪽 라인을 좀 손본다' 라거나 '얼굴 라인 보정은 선호도를 따지기 이전에 얼굴의 굴곡진 부분들을 균등하게 라인을 잡아주는 등' 꽤나 디테일한 작업 철칙들이 그것이었다. 또한 "포토는 배경과, 노이즈가 없는지, 뒷배경 보케가 이쁜지 등등 꽤나 복합적인 요소를 따지지만 모델은 배경이 그냥 평범한 식당이어도 내 얼굴이 마음에 들게 나오면 그것으로 끝났다"라는 이야기들까지도 아주 재밌게 풀어주곤 했는데, 나는 도리가 해주던 이 모든 이야기들을 통틀어 '모델 심리학'이라는 혼자만의 거창한 별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꼭 대숲사진가에 대한 기술적, 심리적인 조언이 아니더라도, 도리는 나와 대학교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도 긴 시간을 함께 알고 지낸 오래되었고, 완벽주의자이자 지혜로운 친구였다. 더불어 언제나 나보다 모든 것을 앞서 가고 있던 친구이기도 했다. 내가 군대에 가 있을 때 그 친구는 이미 학과 내의 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내가 복학을 하고 부랴부랴 교환학생 생활을 떠나려 할 때 도리는 이미 인턴과 각종 공모전 등을 차근차근해나가고 있던 철저한 계산된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던 친구였다. 물론 이 친구 역시 삶에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 나에게 이 친구는 내가 늘 가는 길을 모르겠거나, 서 있는 길 위가 확신이 없을 때 지혜를 묻기 위해 찾는 친구였다. 그래서, 도리는 나와 아주 가깝지만 동시에 앞에 기술한 이유들 덕분에 동경하는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아주 멀리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실 난 많은 촬영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깝다는 이유로 '일단 새로움부터 채워 넣고 다시 돌아와 볼게'라는 뻔한 거짓말의 결과였다는 것도 인정해야겠지만 언제나 나보다는 한 걸음씩 앞서 나가고 완벽에 가까웠던 친구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내가 펼쳐내는 사진으로는 정확하게 그 친구를 만족시켜줄 자신이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무 살의 학교 정문에서부터 느끼곤 하던 '아 도리는 언제나 저 멀리 앞서 나가 세상을 야무지게 살고 있구나'라는 감정과 동일한 선상에서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1년에 한 번쯤은 촬영으로 만나던 우리가 오랜만에 또 한 번 같이 촬영 하나 벌려보자며 양평 구둔역 폐역을 촬영지로 이야기를 꺼냈던 시기는, 코로나를 핑계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부침의 시기였다. 둘 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는 잔뼈가 굵었던 시기였지만, 그 과정에서 많이 내려놓고, 무뎌졌고, 스스로의 선택에 많은 의심과 회의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토록 완벽하고 야무진 친구라고 느끼던 도리 또한 세상이 우리에게 휘두르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겪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에 '그래도 이 친구도 인간미라는 게 있구나'라고 느끼곤 할 때쯤이었다. 


어찌 보면 꽤나 슬픈 이야기였다.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친구의 힘든 시기를 본다는 것은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힘든 일이다. 각자의 처지에서 근심과 힘든 일이 있던 시기였기에, 결과물보다도 과정도 같이 좋은 하나의 여정과도 같은 촬영이기를 바라며 이 촬영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장소만 정해놓고 나머지 준비는 각자가 맡은 부분들을 알아서 했던 기억이다. 굉장히 가까운 사이여서 대충 하는 게 아니냐고 혹자는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또 그런 촬영이 있다. 그냥 그 여정과도 같은 모든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촬영 그 자체가 의미 있을 때가 있다. 구둔역의 철길과 그렇게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래도 검은색 면들도 기억하고 잊지 말자


드넓은 공간 위로 뻗어나가는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질로 비유하자면, 순도 높은 생각부터 불순물까지 모두 섞여 들어오는 오만가지 생각일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생각의 뭉침의 탓이었는지, 이 촬영에 대한 보정 작업은 색을 만드는 과정에서 큰 욕심부리지 않고 채도와 대비를 많이 빼버리고 힘을 빼버린 색이 나오게 되었다. 한 때 정말 많이 쓰던 그런 빛깔이었는데, 오랜만에 장롱 속 필름 카메라 꺼내는 느낌으로 오랜 친구를 위해 추억에 아려오는 색을 완성했다.


그 힘은 뺀다는 과정은 사실 이 시기 즈음의 도리가 내게 해주었던 한 가지 지혜이기도 했다. 언제나 촬영을 했다 하면 큰 스케일의 대단한 결과를 반드시 내야만 했고, 매 순간마다 200%, 300%를 해내야만 한다고 믿었던 내게 '결국 뭘 해도 네가 한 것이라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되니까, 사실 매 순간마다 200, 300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때로는 80으로 가도 괜찮다.'라는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이후의 대숲사진가에게, 그리고 나라는 사람 그 자체에게도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준 지혜였는데, 200과 300을 못해서 끝없는 자기 혹사와 자책을 하는 내 감정선의 허점을 정확하게 메꿔 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날의 우리는 이곳까지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동안 서로의 처지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지만 결국은 저 한 문장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비췄다. 


그랬다. 시간이 끊어진 길 위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가 갈 길을 함께 걱정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길 또한 좋든 싫든 가야만 했으며 '그 누가 봐도' 우리가 지나간 길로 사람들에게 비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길고 끝이 안 보이는 터널과도 느껴지던 걱정의 순간들 조차도 찰나의 시간으로 기억될 때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좀 더 여유만만하게 그 시간을 추억하기를 소망했다. 



결국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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