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컴퓨터와 핸드폰이 좋아져도, 우리의 행복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낮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조사대상 157개국 중에서 57위였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에는 32위다. 거의 꼴찌다. 행복하지 않으니 아이도 낳지 않는다. 2018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인 0.98 명을 기록했고, 신기록 행진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불을 넘은 명실공히 선진국이 된 한국.
아프리카의 공무원들을 만나면 "이렇게 발전한 한국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미국에서 기생충이 오스카 상도 타고, BTS 같은 세계적인 보이밴드도 나오고. 세계 어느나라의 공항을 가도 삼성과 엘지 티비가 달려있는 시대다. 유럽이나 북미를 가도 우리나라가 더 못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요새 우리나라가 정말 선진국이 되었나보다 많이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나 부자나라가 되었는데, 왜 행복하진 않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짚고 싶은 것. 한국에서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라면, 딱 한 가지를 꼽겠다.
공공기관에서는 종종 일 자체보다 보고서를 쓰는 일에 더 치인다. 보고서를 잘 쓰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 장 짜리 문서를 윗사람이 보기 좋게 만드느라 반나절을 소비한다. 내용의 중요도가 높으면 이 한 장에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에 한글 hwp에 존재하는 각종 치트키를 익히게 된다. 나중엔 MS워드 보다 한글이 편해지고, 마치 프로게이머들이 스타크래프트를 하듯 현란하게 손을 놀리며 문서를 만든다. 추측으론, 한글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도 이렇게 까지는 못 할 거다.
한 번 써서 결재를 올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결재라인에 있는 상사를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수정사항이 생긴다. 심지어 내용도 아니고 띄어쓰기, 줄 간격, 글자크기를 수정한다. 팀장이 이미 요렇게 고친걸 / 과장이 저렇게 고친다. 그때마다 과장이 저렇게 고쳤다고 / 요렇게 고친 팀장에게 설명을 해야 한다. 결재만 받는 데도 하루 이상이 걸릴 때가 많다. 보고서 만드는 것부터 결재받는 것 까지, 그 한 장에도 수 일이 소요된다.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가 없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공무원들 참 일이 많다.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못하니 당연히 장시간 근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상사가 해외출장이라도 가는 날엔 아주 난리법석이 된다. 그의 일정을 빼곡하지만, 일에 관련성이 높으면서도, 중간중간 휴식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도록 짠다. 수백장이 되는 출장일정을 제본으로 맡겨 작은 수첩버전으로 만들고, 똑같은걸 a4 종이에 인쇄해서 가죽 바인더에 넣어서 큰 버전으로도 만든다. 어쩌다 변경사항이라도 생길까봐 제본 수첩을 버전1, 버전2로 만들고, 그래도 변경사항이 생기면 그 위에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인다. 이러한 노동의 목적은 오직 하나. 윗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한 국책 연구소에서 일할 때 얘기다. 우리 소장님은 90년대에(아마도) 입사해서 20년을 넘게 그곳에서 근무했다. 소장님이 젊었을 때는 보고서를 손으로 직접 썼다. 좋은 만년필은 필수였다. 한 자 한자 꾹꾹 눌러 예쁘게 완성할 때쯤 꼭 마지막에 실수를 하곤 했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지'해도, 그렇게 한 장을 쓰는데도 수십 장의 종이를 구겨서 버리기가 일쑤였다고.
비슷한 시기에 시청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계장님 이야기는 더 했다. 시장님에게 보고 할 때 큰 전지에 내용을 써가는데, 그걸 대신 써주는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시청 여기저기 과에서 올라온 시장님 보고 자료를 전지에 옮기는 일만 했다. 시장님이 좋아하는 글자체, 여백, 줄 간격에 맞춰서 예쁘게 잘 써주기로 소문이 나면 인기가 만점이었다. 시청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자기 걸 먼저 해달라고 담배나 음료수라도 뇌물(?)을 들고 가곤 했다고.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2020년이다. 그 사이 많은 게 변했다. PC통신 세대가 5G 세대가 되었다. 486 컴퓨터에서 데스크톱, 노트북, 스마트폰이 되었다. 486 컴퓨터로 프린세스 메이커나 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공상영화에서나 나왔을만한 환경이다. 만년필로 보고서를 쓰던 20년 전보다 우리는 분명 더 생산적이어야 할 텐데. 왜 보고서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줄지 않았을까? 기술이 이렇게나 진보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야근 중일까? 왜 우리의 행복은 진보하지 않았을까?
나는 코트디부아르에 온 이후로 근무시간이 현격히 줄었다. 작년에는 1년에 30일이나 되는 휴일을 모두 소진했다. 금요일은 반일 근무이니, 주말은 심지어 2.5일이나 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절대적인 업무량이 한국에서보다 적은 것도 사실이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업무량을 준다. 물론 좋은 상사를 만난 덕분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업무의 내용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업무시간 내 효율적으로 일한다. 문서 만드는데 드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아주 중요한 회의를 하게 되면 워드에 한 장 정도로 정리를 하지만, 대부분의 회의는 간단하게 이메일 상에 정리해서 공유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우 구두 보고로 갈음하는 경우도 많다. 5시에 퇴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가능한 일을 끝내도록 노력한다. 많은 회의를 화상으로 진행해서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줄인다. 그나마 보고서를 쓰는 경우에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한다. 아주 급한 경우에 주말에 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상사는 주말 근무를 당연시하지 않고, 나의 노고를 인정해주고 고마워한다. 일주일에 이틀까지는 재택근무를 하는 게 허용된다. 몸이 안 좋거나 하면 종종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중요한 일만 처리한다.
물론 작년에는 사무실에 와이파이가 아예 안 되어서 생산성에 좀 문제가 있긴 했다. 노트북으로 일하는 많은 직원들은 자신의 핸드폰 데이터를 태더링해서 쓰기도 했다. (정말 열악한 아프리카의 필드 오피스들... ㅠㅠ) 다행히 와이파이 문제가 올해 들어 해결되면서 환경이 훨씬 나아졌다. 기술은 정말 생산성에 중요한 수단이다.
나는 부자나라 한국에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기술적 수단이 좋아진다고 해도, 사회의 프레임 자체가 권위적이라면 효율성은 절대 좋아질 수 없다. 생산성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가 없다. 생산에만 모든 시간을 할애하니 비생산적이고 즐거운 일들을 추구할 여지가 없다. 2020년의 우리는 최신형 핸드폰과 컴퓨터, 5G인터넷을 쓰지만, 여전히 30년 전의 사회적 프레임에 갇혀있다.
그 권위적인 사회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