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새학교에서 4학년을 시작하기 전인 어느 2월 초.
네가 가까스가 뭐냐고 물었어.
처음엔 외국어인가 했는데 문득 '가까스로'에서 로를 뺀 '가까스'에 대해 묻는다는 걸 깨달았어.
코로나가 한창이던 1학년 땐 담임 선생님의 창문을 수시로 열라는 말을 듣고는 '수시'가 뭐냐고 묻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때는 한국말을 잘 몰라서 'sushi로 어떻게 창문을 열 수 있냐'고 물었지.
지금은 아무도 네가 한국어를 모르던 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국어 과목을 잘하지. 외국에서 왔다는 말에 사람들이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라고 반응하면 기분이 좋아. 그죠그죠? 한국어 잘하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그러면 영어도 잘 하겠네요'에는 격렬한 반응을 할 수 없게 되었어. 오는 6월이면 네가 한국에서 산 기간과 해외에서 산 기간이 똑같아지고 해외에서 산 기간 중엔 신생아 시절도 있으니까 모국어였던 영어는 저 멀리 잊힌 언어가 될 거거든.
그렇다고 아쉽거나 하진 않아. 엄마는 초등학교 때 ABCD를 처음 알았는걸. 지금 기준이라면 많이 늦었지? 너도 다시 배우면 되지 뭐. 아쉬운 걸 굳이 하나 고르라면 영국 CBBC에서나 듣던 너의 발음이 사라진 것?
다시 '가까스'로 돌아가보자. 그러니까 이번 질문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 네가 하는 질문이 아니었던 거야. 거꾸로, 그야말로, 억지로, 여러모로, 의외로, 절대로.. 뭐 이런 느낌의 말에 대해 물은 거지. 가까스로에서 '로'를 조사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 나는 기특했어.
가까스로 [부사]
1) 애를 써서 매우 힘들게 (비슷한 말: 겨우)
2) 겨우 빠듯하게
덕분에 나도 가까스로에 대해 더 알아보게 되었는데 어원은 '갓가스로'더라고. 1447년 문헌에도 나오고 1658년에도, 1894년에도 나오는 낱말이 2024년에도 '가까스로'의 형태로 쓰인다는 게 재미있었어. 내가 시간 여행을 할 때 '가까스로'를 써도 조상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지.
너는 어쩌면 이제 '가까스(로)'가 뭐냐는 질문에 내가 'barely'라고 답해도 그건 또 무슨 뜻이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어. 지난 4년 동안 수많은 너의 질문에 그냥 간편하게 대답했던 나의 호시절도 곧 끝난다는 이야기야. 나는 어쩌면 이제 너의 질문에 어원까지 꺼내며 대답해줄 지도 모르겠어. 일련의 너의 말들을 살펴보면 이제 그렇게 대답해도 네가 이해할 것 같거든. (비록 최근에 '일련의 사건'을 '1년의 사건'으로 알아듣긴 했지만)
다음엔 바야흐로, 시나브로, 에멜무지로, 조닐로.. 뭐 이런 거 물어봐줘. 언제든지 대답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동안 해외에서 태어나 영어하느라고 고생했어. 그리고 한국에서 한국어하느라고 고생했어. 장하다. 우리 딸.
...이렇게 노인정을 No 인정으로 알아보던 아이의 어린 시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