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릿립 #5
스스로 나 자신을 분별해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나같이 똑같은 인생의 정리대가 몇 백세대 늘어서 있든 어차피 각각의 가족사진을 넣은 유리 액자틀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한 사람이 사라졌다. 너무나 뻔하게 구획되어 있는 도시에서 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그는 사라졌다. 한 도시에 여행차 머물렀던 이방인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일상의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정적인 분위기에 스스로를 밀어넣는 것처럼 그것이 본래 자연스러운 상태였다는 듯이 그는 사라졌다.
소설은 흥신소 직원인 '나'가 의뢰인의 집을 찾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뢰인은 실종된 네무로씨의 아내다. 1년이나 지난 시점에 경찰들도 찾지 못한 남편의 행적을 쫓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 치고 부인은 너무나 차분하다. 차분함을 너머 체념한 듯한 그녀는 본인이 의뢰한 사건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보인다. 너무 오랜시간 기다림에 시달렸던 것인지 그녀는 반쯤 미쳐버린 사람 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혼자만에 생각에 잠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신비롭고 혼란스러운 공기에 홀린 듯 그녀를 신경쓰기 시작한다.
“부인 잘 들으세요. 저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의뢰인은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아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의뢰인에게 '나'는 답답함에 짜증섞인 말들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의뢰인의 동생이 남편의 실종을 줄 곧 조사해왔다는 것과 그가 1년이 지난 지금 흥신소에 의뢰해보기로 누나를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의뢰인은 동생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에도 혼란스러워하며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혹은 무슨 일을 하는지와 같은 단순한 질문도 답하지 못한다. 그저 전화가 오면 받을 뿐이란다.
의뢰인의 집을 떠난 '나'에게 쥐어진 증거라고는 <동백>이라는 술집의 성냥갑 뿐이다. 혼란스러운 수사를 진행하던 중 <동백>을 방문한 당일 자신을 보며 께름칙하게 웃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의뢰인의 동생임을 알게된다. 그 후 '나'가 네무로씨의 자취를 쫓으며 가는 장소마다 동생을 마주친다. 네무로씨의 실종과 관련된 동기를 알아낼 수 있는 강력한 증거인 일기도 동생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생은 일기를 내어주기는 커녕 그 때마다 '나'를 자극하는 말을 던지고 홀연히 사라진다.
자신의 남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의뢰인과 수상하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생 그리고 아무리 다가가도 잡히지 않는 네무로씨의 행방. 모든 것이 혼란스러움 그 자체다. 그 때 의뢰인의 동생이 우연찮게 살해된다. 그 시점부터 이야기는 추리 소설의 틀을 던져버린다. 사라진 네무로를 찾아 낼 모든 증거들은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모든 조각들을 맞추어보았지만 완성된 그림에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는 허탈함.
그가 사라지고 의뢰인의 동생이 살해당하고 그의 부하직원이었던 다시로가 자살하고 아내에게서는 전화한 통 없고 내앞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마냥기다리기만 하는 그녀뿐이다. 모두 다 사라져간다. (...) 존재하지 않는 이들끼리 상대를 찾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술래잡기.
동생이 살해당한 후 '나'는 실종 당일 네무로씨와 만나기로 한 직장 후배 다시로를 만난다. 다시로 역시 네무로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나 그 진위여부를 가리기 힘들다. 심지어 다시로는 네무로씨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대한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한 채 수사에 혼란을 주게된다. 그런 다시로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이에 다시로는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다시로의 자살 사건에 연루되어 '나'는 흥신소를 그만두게 되고 홀로 수사를 진행한다.
다시로 : 전 말이죠. 아침 만원 전철속에서 절임처럼 꾹꾹 짓눌려있다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워질 때가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평소 얼굴을 알고 지내는 몇 명이나 몇십 명 몇백 명과의 교류만으로 세상에 확고하게 자기 자리를 잡았다고 굳게 믿죠. 하지만 아침 전철 훨씬 가까이에서 그토록 빽뺵하게 나를 에워싼 인간은 모두 낯선 타인이고 게다가 생각해보면 그런 타인이 훨씬 많잖아요. 아니 그건 그나마 괜찮아요. 정말 두려운 건 전철이 마침내 종착역에 도착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떠난 사람에게 던지는 물음은 어떤 것이든 무용하다. 어디에 있는지 왜 사라졌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한가지 변치 않는 사실은 그는 떠나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나'가 원래는 네무로씨와 같은 회사원이었으며 그러한 삶에서 도망쳐 흥신소 일을 시작한 배경을 가진 인물로 설정하며, 도망자 네무로 도망치고자 하였으나 도망치지 못한 '나' 그리고 자살한 다시로의 삼각구도를 만들어낸다.
다시로가 아침 전철에서 느낀 막연함을 우리도 경험한다. 질서는 내가 아는 세계고 혼돈은 내가 알지 못한 세계다. 질서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면서 모두 자신만 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하늘의 구름은 쏜쌀같이 똑바로 흘러가지만 땅에서는 엄청나게 불규칙적인 종잇조각들의 운동이 눈에 띈다. (...) 그 운동은 인간의 예측을 배반하고, 의표를 찌르며 어떤 종류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공기가 물질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다. 부드럽게 땅위를 기어간다 싶더니 갑자기 반전하며 위로 치솟고 빠르게 옆으로 날아가 자동차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고 사뿐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안타깝게도 차바퀴 밑에 깔리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지도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여러 우연과 선택이 점철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지도가 더이상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형태도 인지할 수 없는 퍼즐은 끝내 완성될 수 없다. 본래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로 상정되지 않는 인간을 여러 조각으로 꾸며 설명한다 해도 그 과업은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그 지도가 '자기 자신'을 담아낸 주관이든 더 넓은 영역의 '세계'를 표상한 것이든. 너무나 뚜렷이 구획된 도시에서도 헤맬 수 있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을 느낄 수 있다. 굵은 선이 그어진 선명한 지도를 보고도 어쩐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할 수 도 있다.
결국 이 낯익은 감각도 실은 진정한 기억이 아니라 아주 그럴듯하게 위장된 가짜 기시감에 불과하다면 내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판단 역시 기시감을 합리화 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나자신조차 이미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의심스러운 존재가 되버린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그대로 전화부스 안에 웅크리고 만다. 구석에 둥글게만 신문지가 있고, 그 밑으로 까맣게 말라붙은 대변덩어리가 엿보인다. 그 대변갖아자리에는 잘록하게 끊긴 자국이 낭씨다. 밭줄로 홀쳐맨 듯 잘록한 자국이다. 그 끊긴 부분에 무슨 채소의 섬유질인지 거친 붓끝처럼 볼풀이 일어나 있다. 딱히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나는 엉겁결에 벌떡일어나버리고 만다. (...) 꽤 오랫동안 참았던게 틀림없다.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용변을 해결해야 할 만큼 대변을 계속 참을 수 밖에 없었떤 남자.
물론 그 남자가 나처럼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본디부터 갈 곳을 잃어버렸다는 자각조차 없는 부랑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다. 의사라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커브 저 너머가 아니라 기억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할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믿어주겠는가. 누구란도 제아무리 건강한 인간이라도. 자기가 알고있는 장소 이외의 것을 알 턱이 없다. 누구든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이미 알고있는 좁은 세계에 갇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언덕 커브 앞, 지하철 역. 커피숍 이 삼각형은 물론 좁다. 너무나 좁다.
그러나 이 삼각형이 열배로 넓어진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삼각형이 십각형이 된다 한들 뭐가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인가. 만약 그 십각형이 열린 무한으로 통하는 지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 구조를 요청한 전화에 응해 찾아올 구세주가 실은 내 지도가 생략투성이인 약도에 불과하다고 자각시켜주는 지도 밖에서 오는 사자라면 그인간 또한 존재함녀서도 존재하지 않는 저 커브 너머를 엿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도를 가지고 안심하는 자는 단순히 자신을 가두고 제 손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자에 불과하다. 그 문을 닫은 것도 심지어는 그 문을 만든 것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객관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지도를 과감히 태우고 기꺼이 사막을 횡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는 일은 이제 집어치우자. 손으로 끼적인 메모에 매달려 전화를 거는 일도 이제 진력이 났다. ... 나는 무의식중에 납작해진 그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 했는데 그러자 오랜만에 분에 넘치는 환한 미소가 뺨을 녹이며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