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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 Sep 19. 2019

1 Sep : 사랑스러워, 당신!

Movie <내사랑>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모드.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병은 그녀에게 구부러진 몸과 부자연스러운 얼굴 근육을 주었고 남들과 다른 외형을 가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과 단절돼 살아간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하나 남은 가족인 오빠에게 버림받고 그길로 함께 생활하던 숙모의 집에서도 눈칫밥 먹는 신세가 된다. 세상으로부터 모드를 단절시키고 돌보기만 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신물이 난 모드는 스스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는 그길로 숙모의 집을 떠난다.

철저하게 혼자였던 모드에게 유일한 낙은 그림이다. 만날 수 있는 세상이라곤 작은 창문으로 허락된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그녀는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누구도 듣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은 모드의 이야기, 그것이 온전히 담겨있는 그림은 단연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일자리를 구하던 모드는 한 가게에서 가정부 구인 전단지를 발견한다. 구인 광고를 낸 사람은 작은 나무집의 주인인 에버렛. 지팡이를 짚고 겨우 움직이는 몸을 가진 그녀를 가정부로 쓰겠다고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에버렛은 처음에 모드를 거부한다. 하지만 모드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녀를 집에 들이기로 마음먹는다. 함께하게 된 그들의 일상은 예상했듯이 순탄치 않다.



갈등의 불씨는 주로 에버렛의 성격에서 시작된다. 되는 것은 에버렛의 성격이다. 영화 초반 에버렛의 모습을 보면 ‘쓰레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집안일에 소질이 없는 모드에 에버렛은 호통은 물론이거니와 내쫓기도 서슴지 않는다. 생활력이 부족한 그녀를 두고 게으르다며 비하하기도 한다. 또한 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나간다. 늘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주는 모드에게 에버렛은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선이 드러나며 에버렛의 쓰레기모먼트는 정점을 찍는데,

모드에게 에버렛은

"이 집의 서열을 말해주지"

"나, 개, 닭 다음이 당신이야"

라던지



그녀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버렛의 친구가 그에게 "어쨌거나 여자를 들인 게 아니냐"며 말하고 반복되는 에버렛의 부정에 "잠은 어디서 주무시냐"고 빈정거리 까지 한다. 하지만 맥락상 친구는 에버렛에게 단순한 장난을 친 것일 뿐인데 그는 과한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그 모습을 해맑게 보고 있던 모드의 뺨을 세게 때린다. 모드가 자신의 아내가 아닐뿐더러 자신에게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진짜 한 침대에서 자게된 둘. 



영화에서 모드와 에버렛이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은 세 번 나온다. 작은 오두막에서 두 명이 사는터라 에버렛과 모드는 한 침대에서 잔다. 그들이 함께 보낸 첫날밤 둘 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늘 차갑게 대하지만 에버렛도 모드를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


두 번째 침대 장면에서는 에버렛이 모드에게 관계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드는 과거에 가졌던 아이가 태어나서 죽었던 상처를 이야기하며 결혼을 해야만 관계를 가질 것이라며 선을 긋는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그 후로 모드는 에버렛에게 사이를 진전시키길 원한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오두막에 와서도 모드는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날 모드는 에버렛에게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에버렛은 돌연 “너랑 하느니 나무토막이랑 하지”라는 망언을 내뱉는다. 상처를 받은 모드는 울음을 터뜨린다.



에버렛은 누군가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라 그 후 목수와 어부 등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하며 그 역시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의 육체를 뉠 정도의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가진 두려움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또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 에버렛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런 유아적인 두려움 또한 그중 하나다.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긴 모드를 보면서 호통을 친 이유도 그녀가 성공하면 떠날 것 같아 불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런 그가 모드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변해간다. 모드를 울린 밤이 지나고 그날 아침. 모드와 에버렛은 남은 생을 부부로 함께한다. 그렇게 지낸 뒤 모드의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뉴욕에서 의뢰가 올 정도로 모드의 작품은 유명해진다. 모드와 에버렛의 작은 오두막은 방문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TV에도 소개된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돌아오고 모드의 상태는 악화된다. 에버렛의 도움으로도 걷지 못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그림을 그리다 쓰러진 모드를 업고 에버렛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실에 누워있는 모드를 보고 에버렛은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깨어난 모드에게 에버렛은 그동안 그녀를 부족하다 여겨왔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모드는 자신은 사랑받았으니 충분하다고 웃으며 답한다.




현대인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자. 깨어있는 시간 학업과 생업에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휴식으로 보낸다. 우리에게 휴식은 호숫가를 걷거나 볕드는 마당에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독서나 영화 감상도 진정한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사를 떠나고자 집어 든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더 많은 소식과 광고를 전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효용을 가져주는 휴식이다.


그런 휴식이 우리에게 유발하는 행위는 ‘비교’다. 스마트폰을 통해 듣는 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인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부터 모든 매체에 자리한 광고까지. 그리고 대부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아주 멋진 일이다. 그런 잘난 사람들의 잘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황과 비교하게 되고 높은 확률로 우울한 감정에 빠진다.


타인의 삶을 관조하며 느끼는 허탈함은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떠올리게 한다. 책에서 주인공 ‘나’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다. 그림자는 일종의 희노애락을 의미한다. 짝사랑하던 미경과의 새 출발을 희망해보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누군가와의 관계라고 독백한다. 자신의 삶에서조차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탓하는 그의 모습이 삶을 비관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적절하게 대응된다.


이제는 이 세상, 아니 자신의 세상에서조차 ‘나’가 주인공이기는 글렀다. 자신의 이야기가 타인의 것보다 가치가 있을지 늘 자문하고 재기만 하다 지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무대가 있다. 시상식의 한 장면처럼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와 우리가 올라가기를 고대하며 준비된 축하의 노래 그리고 박수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무대. ‘사랑의 무대’다.


모드와 에버렛의 삶은 버려진 이야기다.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고 그로써 세상에 바로 설 용기도 잃어버렸다. 특히 에버렛은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모습 따위는 없었고 이대로 생명만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 든다.


그런 둘이 만나 사랑을 한다. 상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수용하는 행위에는 관계에 속한 두 사람 모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그들이 가진 상처마저도 사랑 안에서는 서로가 필요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일상의 이야기들도 사랑 속에서 일어나면 모두 영화로 변모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저녁 산책길이 마치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양 흐뭇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특별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은 더욱 경이롭다. 그녀가 그의 양말 색이 카나리아 색임을 맞춘 것은 그들의 사랑이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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