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유
레지던시와 Elective의 의미
레지던시 시절, 의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에게 Elective (또는 선택실습) 는 하나의 특별한 기회입니다. Elective는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1주일 혹은 2주일 동안 지도 의사 선생님 아래에서 배우고 일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의료라는 좁은 세계에서는 네트워크가 곧 기회입니다.
사실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의료 분야에서는 특히 **‘무엇을 아는가’보다 ‘누구를 아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는 단지 취업을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인간관계가 곧 신뢰와 연결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흐름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결코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의사들과 협력하고, 조언을 구하고, 때로는 함께 해결책을 찾는 과정 속에서 네트워크는 생명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며, 제가 했던 경험들을 동기나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공유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고, 그들의 여정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역할은 충분하다고 느낍니다.
MAiD와 나의 첫 경험
캐나다에서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가 합법화된 것은 2016년입니다. 이는 의료 윤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깊은 논쟁 끝에 이루어진 변화였습니다. 이후 2021년 3월, 법이 새로 개정되면서 정신 질환으로 인한 MAiD 요청에 대한 문턱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2024년 3월부터는 더 이상 ‘불치병’이라는 조건에 국한되지 않고, 정신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에도 MAiD가 허용될 예정을 위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중대한 사안인만큼 유예되었습니다 ((https://www.justice.gc.ca/eng/cj-jp/ad-am/bk-di.html#e)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이미 2002년에 EAS(euthanasia and assisted suicide)를 허용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의 구분을 두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좀 더 보수적으로 접근하여, 초기에는 정신 질환을 MAiD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이에 대해 캐나다 보건부는 전문가 패널을 통해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했으며, 충분한 연구와 소통을 위해 유예 기간을 두었습니다.(https://www.canada.ca/en/health-canada/corporate/about-health-canada/public-engagement/external-advisory-bodies/expert-panel-maid-mental-illness/final-report-expert-panel-maid-mental-illness.html#a131)
Elective의 좌절과 MAID와의 첫 만남
레지던시 시절, 저는 MAID Elective를 신청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주는 지도 의사가 없었기에, 실제로 MAID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졸업 후 MAiD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제게 공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20년,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휴가차 집에 머물던 시기에 저는 우연히 CMA(Canadian Medical Association)에서 제공하는 무료 MAID 코스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이 코스를 들어야 할까?"라는 고민 끝에, 결국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요양원 의사로도 일하고 있던 저는 MAID에 대해 더 깊이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팬데믹이 몰고 온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저는 Palliative care와 MAiD의 수요가 높아질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관심과 사회적 필요가 맞아떨어진 이 기회는 저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코스를 수료한 이후, 저는 실제로 제 환자 중 한 명의 MAiD 평가 과정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있어 첫 MAiD 환자였습니다. MAiD 팀의 도움을 받아 평가 과정을 완료했지만, 당시 저는 너무 서툴렀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이후 몇 개월 뒤,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그 경험은 저를 한없이 작고 부족한 존재로 돌아보게 만든 순간이었습니다. 제 자신과 제 가치관을 다시 한 번 겸손하게 돌아보는 기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마지막 여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제게 깊은 생각을 남겼습니다. 의료라는 직업은 단순히 기술적 숙련도를 넘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일이었습니다.
경험의 소화와 나아갈 길
Elective라는 제도가 그렇듯,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단순히 지나가는 사건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삶에 녹여내는 것입니다. 저는 MAID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제 의료인의 정체성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답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2023 08 - Edworthy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