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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Oct 07. 2019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거림골'

남부군 이태, 죽음의 기로에 서다

  

▲ 거림골 입구에 있는 소나무와 반석


지리산자락으로 태풍 ‘타파’의 큰 비바람이 지나간 다음날, 국도20호선(지리산대로)을 따라 경남 산청군 시천면 곡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듬해 여름, 빨치산이라 불리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남부군 소속의 이태(李泰)가 치열하고도 처절했던 산중생활을 마감하고 ‘인간이 사는 세계’로 귀환한 곳이기도 하다.    


이태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중앙통신사 전주지사의 기자로 있다가,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1950년 9월 말 즈음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사령부가 있는 회문산(전북 순창군, 임실군)에서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전북도당사령부는 1951년 3월 토벌대의 집중 공세를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 팔공산, 장안산을 거쳐, 백두대간 산줄기인 백운산, 육십령, 덕유산 방면에 머문다. 이때 이태는 당시 빨치산들에게 창궐하던 재귀열(발진티푸스)에 걸려 백운산의 ‘환자 트’(아지트의 준말)에서 생활하다가, 1951년 6월 10일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휘하의 ‘상승부대’, 즉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승리사단‘으로의 전속명령을 받는다. 남부군은 남덕유산과 백운산에 머물다가 함양 안의면, 산청 생초면을 거쳐 1951년 8월 10일 황매산으로 이동한 후, 드디어 지리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남부군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이태의 수기 ‘남부군’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앞서 가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거요!”(8월 16일)’    


지리산 자락 산청으로 들어온 남부군이 이후 이동한 경로는 지금 산악인들에게 ‘달뜨기능선 코스’로 잘 알려진 웅석봉-감투봉-이방산을 거쳐 시천면 덕산(사리絲里)으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남부군은 덕산 장터 전투 등을 치르며 지리산 자락으로 다가가는데, 바로 신천초등학교 인근의 곡점 개울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오후, 심한 위장병과 각기병을 앓고 있던 이태는 부상병들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고, 부대를 떠나 거림골 ‘환자 트’로 들어서게 된다. ‘거림골로 들어서며 두 개의 물줄기 중 오른쪽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지금의 거림계곡이 아닌 도장골로 들어선 듯하다. 이렇게 해서 이태가 처음으로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덕산-곡점-거림으로의 동선(動線)이 이루어진다.     


그후 거림골의 ‘환자 트’에서 나온 이태는 수많은 지리산의 산줄기와 골짜기를 넘나들고, 멀리 곡성까지 진출하는 등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며, 그해 10월 중순 달궁골에 은신하던 남부군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지리산 자락을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는 11월 하순에 학동골(하동 청학동 도인촌 골짜기)에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그들은 ‘엄숙한 계절’, 지리산에서의 첫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1년 12월 동계대공세(작전명 : 쥐잡기 작전) 때에 남부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되고, 그 후 100여 명도 채 안 되는 생존 빨치산들은 토벌대를 피해가며 몸서리치는 굶주림과 동상을 견디면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 이태는 우여곡절 끝에 문춘 참모(편대장)와 함께 52년 1월 거림골 ‘무기고 트’에 은신한다. 남부군이 비상선으로 자주 이용했다고 하는 곳으로, 이태는 1951년 12월 동계 토벌 때에도 이곳으로 도주를 하였던 적이 있다.     


이곳에서 죽음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모면한 이태 일행은 다시 남부능선 삼신봉으로 이동하였다가 봄이 올 무렵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조금 비껴있는 주산 아래 ‘고운동’으로 이동하여 숨어 지낸다. 반천마을, 배바위, 산청양수발전소 상부댐이 있는 바로 그 골짜기이다.     


3월 중순의 어느 봄날, 문춘 참모의 지시로 다시 거림골 무기고 트의 상황을 살펴보러 가던 이태는 결국 일행과 헤어지며, 중대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이 사는 세계로’ 귀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1592년 3월 19일, 곡점 아래 외공마을 가는 길에서 토벌대에게 투항하듯 붙잡히게 되는 것이다.    


▲거림계곡. 거림마을과 세석대피소로 이어지는 등산로 상에 있는 '천팔교' 옆 계곡 풍경. 거림마을에서 약 3km 조금 못미친 지점에 있다.   


오후 네 시가 다가오는 시각, 세석대피소로 오르는 거림계곡으로 들어섰다. 도장골은 비법정탐방로로 통행을 막고 있다. 1시간 남짓 걸어 3km 못 미쳐 있는 ‘천팔교’에 이르러 계곡으로 내려섰다. 1000m고지에 이르는 곳의 물길이지만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숲과 계곡, 산길을 번갈아 둘러본다. 그의 말대로 수없이 다녔다는 거림골 어딘가에 있을 그의 흔적을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28세의 청년 빨치산을 떠올린다.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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