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넘게 지지고 볶은 오피스텔에 안녕을 고하고 방이 있는 공간으로 이사하기로했다. 남편은 시간 내기 어려우니 괜찮은 집을 추려놓으면 다시 함께 가보기로 얘기가 되었다.
퇴근 후 한 빌라에 도착했다. 우리같은 신혼 부부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이사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20년이 훌쩍 넘은 만큼 낮은 층고에 엘리베이터도 없었으며, 방이 3개라지만 존재 자체에만 의의를 둬야하는 크기. 집보다는 그 부부의 이사가, 발전이 부럽던 찰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냉장고였다.
정확히는 냉장고 문짝 위에 자석으로 고정된 이번 달 월력 한 장. 그 안엔 빼곡한 부부의 일정이 적혀있었다.
"ㅇㅇ회식", "ㅁㅁ생일", "ㅇㅇㅇ기념일", "xxx잔금" ...
친구 신혼집에 갔을 때도 목격했던 부부공용 캘린더였다. 이 얼마나 현명한 제도인가 싶어 도입하려 시도했지만 남편의 저항에 부딪혀 좌절된 바 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약속하거나 확정해 놓는 것을 꺼린다. 살다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괜히미리 '장담' 했다가 실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상황이 싫다 했다. 대신 일이 예상과 다르게 풀리더라도 항상 '그럴 수 있다'는 낙천적 마인드와 너그러운 면을 잃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또 너무나 즉흥적이고 해맑은.... 불멸의 쳇바퀴 딜레마.
집 구경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일정이 그 정도로만 공유 돼도 다툴 일이 적을 것 같아.집안 대소사나 주말 약속이라도 공유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열 번 두드려 안 열리는 문은 없는 것인가. 놀랍게도 요청을 접수한 남편이 휴대폰으로구글캘린더를 공유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미 쓰고 있던 기능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친구 추가가 잘 되지 않아 버벅대던 중, 성질 급한 나는 "아 그냥 안 할래. 우리도 냉장고 달력이나 쓰자"라고 다시 한 번 제안했으나(냉장고 달력에 꽂힘) 차분히 두 개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던 남편은 마침내 완성해냈다. 자리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비포&애프터. 함께 쓰니 빽빽
달력 공유는 술자리나 모임 약속 사전신고제일뿐 아니라, 딱히 할 말 없을 때도 요긴하게 사용된다.
회의에서 별 일 없었는 지 물어보면 남편의 현안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오늘 청약 접수했냐는 남편의 확인이 없었더라면 놓칠 뻔 했던 당첨 기회도 어찌보면 이 달력이 가져다 주었다. 4년 넘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이렇게 한 발 한 발 조금씩 '공동체'가 되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