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유러피언>을 '관독'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
역사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을 내놓았던 영국의 대 역사가 올랜도 파이지스 교수 (런던대학 버벡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의 신간, <유러피언>은 유럽 역사에서도 특히 격동의 시기였던 19세기 유럽사를 집대성한 명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 가수이자 작곡가인 폴린 비아르도, 언론인 겸 저술가인 루이 비아르도 이다. 올랜도 파이지스 교수는 이렇게 세 사람의 생애를 통해 19세기 유럽 역사를 개인의 차원에서 미시적으로 쪼개다가도, 흩어져 있는 곁가지들을 조합하여 굵직한 거시적 역사의 뿌리로 통합해나간다. 그러니 이 책은 19세기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 예술 전반을 모두 다루고 있는 종합 교양서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올랜도 파이지스 교수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언제부터 기획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연구와 조사를 해왔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최소 10년 이상을 연구해온 역사가의 지식을 통째로 흡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관독'을 할 것을 추천한다. '관독'은 고영성 작가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소개한 독서법 중 하나이다. 고영성 작가에 따르면, '관독'이란 특정 관점을 지닌 채로 텍스트를 해당 프레임 내에서 면밀히 뜯어보는 독서법을 말한다.
<유러피언>을 읽을 때 특히 관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를 통섭적으로 다루는 역사 책일 뿐더러, 900쪽에 달하는 벽돌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점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방향을 잃기 쉽다. 그러다보면 흥미를 잃게 되기 마련이고, 중도에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거나, 중요한 것을 흘리면서 읽기에는 이 책이 너무 아깝다. 너무도 많은 인사이트가 녹아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독을 하면서 이 책을 읽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보물같은 인사이트를 수도 없이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진정한 창조자는 가장 평범하고 비루한 것들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낸다"라고 했고,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위대한 통찰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라고 했다.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에서 장엄함이라는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바로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영성, p155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두꺼운 벽돌책을 '경제', '경영', '마케팅'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독해했다. 본 글에서는 <유러피언>을 '관독'하여 얻은 나만의 인사이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19세기 유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에서 역동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했던 변화는 '철도의 개설'이었다. 철도가 유럽 국가들의 경계선을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유럽 내 각국의 문화가 서로 충돌하고 융합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국제 여행이 활성화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문화 예술에 대한 공급과 수요가 크게 확장되는 시장 확대의 시기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배계층이 왕족과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교체되는 가운데, 주요 소비자층이 바뀌고 그들의 니즈가 변하면서 예술과 자본주의 사이의 새로운 지각변동이 발생했다.
그 말인 즉슨,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 '시장'의 변화가 급속도로 꿈틀거리던 시기였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마케팅에서 말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4P (Product, Place, Price, Promotion)'와 '세그먼트', '타겟의 니즈'가 급변하는 시기라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격변기의 비즈니스는 기회도, 리스크도 크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날카로운 눈썰미로 기회를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길 앞으로 밀어 닥치는 변화의 폭풍, 그 중심으로 과감히 달려들어 값진 성과와 성공을 쟁취해낸다. 반면, 누군가는 변화의 폭풍이 목전에 있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이미 지나온 길 위에 찍혀있는 발자취만 바라보다가 그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저 멀리로.
결론적으로 19세기 유럽의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 위한 핵심은 '생산 기술', '사업 관리', '마케팅', '홍보', '사회적 네트워크의 확장전략', '저작권 등의 법적 제도의 운영'을 고려하여 사업을 운영하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예술가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자본화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다시말해 사업수완이 있어야 예술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예술가들은 사업가적 면모를 갖춰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먼저 그들이 생산해내는 제품과 서비스가 음악, 그림, 책 등의 예술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중요한 수입원은 출판권과 인세 등의 지적 재산권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19세기 유럽은 철도를 통한 시장확대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잘 보호하면서 널리 유통시킬 수 있는 사업가적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악보 출판업이 발전하면서 작곡가는 새로운 소득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작곡가는 악보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것을 출판하는 데 따르는 수수료나 인세를 받았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194 -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와 쇼팽은 이러한 관점에서 어찌보면 실패한 예술 사업가였다.
먼저 모차르트는 자신의 작품의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악보출판업이 새로운 커다란 시장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이를 통제하지 못한 것은 커다란 기회손실이었다. 그가 고용한 악보 복제사들은 어둠의 경로로 그의 걸작 악보들을 싼 값에 팔아치우는 해적판을 시장에 유통시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챙긴 꼴이 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출판 악보에서 아주 소액의 돈을 벌었을 뿐인데, 그가 고용한 복제사들이 해적판을 내서 그 수입을 대부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는 복제사들을 자기 집에서 일하게 하고 철저하게 감시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썼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194 -
쇼팽은 마케팅에 대해서 만큼은 문외한이었다. 먼저 자신의 작품의 악보에 대한 가격책정에 실패했다. 적정한 가격을 책정하지 못한 까닭에 그의 작품들은 시장 균형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었다. 앞서 보았듯 해적판 불법 복사물들이 유통되던 시기였음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당연히 지속가능한 수입모델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쇼팽은 돈 관리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가정 내 악보 시장에 잘 적응하여 피아노 악보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는데도, 그가 출판한 작품으로 벌어들인 돈은 미미했다. 1844년 그는 그의 마주르카(작품번호 55)와 야상곡(작품번호 56)에 대한 프랑스 내 출판권을 각각 겨우 300프랑을 받고 슐레징어 출판사에 넘겼다. 독일 출판권에 대해서 브라이트코프 앤 헤르텔은 그보다 더 적은 돈을 내놓았다. 이러한 수입은 그의 사치스러운 지출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치스러운 가구를 들여놓았고, 값비싼 레스토랑에 다녔으며, 우아하게 재단한 옷을 입었다. 또한, 파리에 나와 있는 가난한 동포 유배자들에게 관대하게 선물을 주거나 돈을 빌려주었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231 -
뿐만 아니라, 쇼팽은 시장 세그먼트와 타겟팅에 실패했다. 자신의 작품을 소비해줄 수 있는 주요 잠재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후에 후세대들에게는 인정받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쇼팽 자신이었다. 그는 출판사들이 고액을 지불하려고 하는 그런 피아노곡 -가볍고 경쾌하고, 듣기가 좋고, 아마추어들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임기응변, 친밀함, 내면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비전통적인 작품이었고, 비록 파리 내 수천 명에 달한다는 그의 추종자 그룹이 쇼팽 음악을 좋아했지만, 탈베르크,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인기 높은 작품처럼 대규모로 팔려 나가는 음악은 아니었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232 -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서는 화려하고 기계적인 음악을 써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해."
- 쇼팽이 그의 친구 보이체프 구지마와에게 보낸 편지 중 -
게다가 쇼팽은 작품의 퀄리티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잡아서 작품을 양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다. 물론 예술가로서 완벽주의는 보다 질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애티튜드지만 돈벌이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을 빨리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의 가장 훌륭한 곡들의 출판을 계속 미루었다. 그가 여동생 루드비카를 위해 작곡한 C단조의 야상곡 같은 작품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232 -
반면, 베토벤은 예술과 사업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은 바람직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은 당시 시장의 가장 커다란 문제인 해적판의 유통을 현실적이면서도 최대한도로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먼저 그는 악보 복제사들이 무단 불법 유통의 근원이라는 점을 빠르게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마지막 몇 페이지의 복제는 의뢰로 맡기지 않고 직접 카피하는 방식을 택했다. 뿐만 아니라 철도로 인한 시장확대가 긍정적인 효과도 있으나, 국제적인 해적판 출판의 부정적 효과도 있음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여러 국가에서 동일한 시점에 동시출판 하는 것이 이를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베토벤은 좀 더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그는 자기 작품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자신이 직접 카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 그는 유능하면서도 떄로는 영리한 사업가이기도 했는데, 출판사들로부터 더 높은 보수를 받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국제 해적의 문제에 대응하겨고 그는 같은 곡을 서로 다른 국가의 여러 출판사에 팔면서 그것을 동시 출판하려고 했다. 철도와 전신이 도래하기 전의 시절에 그런 시도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작권법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195 -
베토벤은 시장통제와 저작권 보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활용한 수입원을 여러 방면으로 확장시키는데 능했다. 다른 말로 수익의 파이프라인을 확장시키는 것을 통해 수익 경로를 늘림과 동시에 리스크를 헷징하고자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자기 음악만으로 자립하고자 상당히 노력했다. 그는 프리랜스 작곡가로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으나, 근근이 생활비를 벌어들이는 정도였다. 그런 가외 수입의 방법은 강의, 콘서트, 주문받아 작곡하기, 부유한 남녀에게 곡을 헌정하는 조건으로 그들에게서 기부금을 받기, 악보를 출판사에 팔기 등이었다.
- <유러피언>, 올랜도 파이지스, p195 -
"이 세상에는 예술 시장이라는게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시장이 있어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내놓고 필요한 만큼의 돈을 받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렇지 못해서 예술가는 어느 정도 사업가 노릇도 겸해야 합니다."
- 베토벤이 출판사 '프란츠 호프마이스터'에 보낸 편지 중 -
19세기 격동의 유럽사를 다룬 <유러피언>을 '경제', '경영', '마케팅'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보면 이러한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변화의 시기에 누군가는 기회를 포착해낸다. 그들은 변화가 자신의 비즈니스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보고 실현 가능한 전략을 구사하여 이를 실행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낸 사업전략으로 기회와 리스크를 적절히 관리하며 그들은 개인적인 성공과 재정적 자유를 쟁취해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보는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거나 확장시킨다는 측면에서 사업부문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사이트가 비단 19세기 유럽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철도가 개통되며 네트워크의 망이 새롭게 조직된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 SNS, New Media의 출현으로 개인들은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네트워크망으로 엮여지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활용하여 새로운 마케팅, 홍보 전략으로 시장을 주도해나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유러피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들은 굉장히 많고 값지다.
이것이 '관독'의 매력이다.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더욱 깊게 탐구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벽돌책을 격파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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