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십자가를 바라보라
Head UP to the Cross!
골프에서 공을 잘 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HEAD UP(머리 들기)이다. 머리를 들지 말고 땅에 있는 공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공을 치기 전에 머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규칙이다. 하지만 이것은 초보의 이야기다. 어느 정도 기초를 잡고 나면 머리를 들고 홀컵(목표)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난 '머리를 들라'라고 외치고 싶다.
곧 메타버스 시대가 되리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페이스 북의 이름도 메타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인간은 이미 태초부터 메타(초월 혹은 가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성경에는 그러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데아의 장소, 곧 '천국'과 '이생'의 삶 말이다. 알파(처음)와 오메가(마지막)이자 초월적이고 가상적인 신이 만든 이 세상 자체가 메타버스인 것이다. 세상의 땅만 바라보았기에 보이지 않았던, 아니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무시했던 장소인 천국이 나에겐 메타버스인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에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과연 어떤 능력을 갖추어야 할까? 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은 십자가 아래로 다시 돌아왔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바로 메타버스로 안내해주는 통로(passage)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를 넘어선 추상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briedge)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그리도 열심히 찾았던 이데아의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VR 기어(gear,장비)가 필요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NIV Hebrews 11:1)
아니, 왜 교사에게 이러한 믿음이 필요한 것일까?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없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고 항변하거나 거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난 아직 이것 외의 다른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이기성과 무지를 아는 것이 좋은 선생님 마인드 셋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 이외에 어느 것도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도록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holy spirit)이 눈을 열어 주어야 메타인지, 즉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난 이러한 경험을 21세에 하였고, 나의 악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그 첫걸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온전한 용서와 사랑의 증표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십자가는 청년 예수가 두 손가락과 발에 못 박힌 채 매달려 피와 물을 다 쏟은 곳이다.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가장 극한 형벌로 극악무도한 인간이 받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왜 그 추악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까? <영어 참견 1>에서 동행한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면서 난 이스라엘의 청년 예수가 떠 올랐다. 비슷한 듯 하지만 너무나 다른 모습의 재판 장면이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나 너무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해 변명이라기보다는 항변을 하는 모습을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의 방에서 멋지게? 독주의 잔을 마셨을 것이다.
반면에 청년 예수는 변명이나 항변의 말 한마디 없이 빌라도의 재판에 순응하였다. 자신을 그리 따라다니면서 병 고침을 받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해 먹기도 하고 물이 포도주로 바뀐 가나안 잔치에서는 술도 한 잔 하면서 늘 함께 한 유대인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에 아무 반응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골고다(히브리어: 해골)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라마 라마 사박다니(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이 전부였다. 게다가 그의 옷까지도 군인들이 네 쪽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져가고, 통으로 짜인 속옷도 빼앗기는 처참한 모습이다(요 19:23). 이러한 모습 또한 예언서에 이미 기록되어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오.' (이사야서 53 장 1-8절)
왜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예수는 이러한 죽음을 피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전 인류를 구원해야만 하기에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그 시간을 견딘 것이다. NQ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NQ(network quotient)는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신과 인간이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행복지수이자 공존능력이다. 그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믿음'이라는 VR 고글을 장착만 한다면 누구나 현세의 땅에 살면서도 이생의 천국에서 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가난과 전쟁과 기근, 그리고 폭력과 질병으로 고통받아야만 하는 현실세계다. 게다가 육체적인 죽음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천국의 기쁨과 평안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메타버스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교사의 역할은 더욱 힘써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땅에 좋은 교사로 서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돌아보면 나도 여러 번 십자가를 내려놓고자 했었다. 하지만 다시 짊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믿음과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느새 영어 중매 십계명의 마지막 장이 되었다. 청년 예수를 오랜 시간 따라다니면서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였다. 무언가 쉽고 간단한 해답을 줄 것을 기대하였는데, 예수의 제자인 마태와 누가를 통해 들은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0:38)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7)
영어와의 중매 레시피 열 번째 비법: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