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인생 내비게이터

Epilogue: Life Navigator

by 영어 참견러

아침도 상쾌한 기분으로 강아지와 함께 산책길에 나섰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도토리 몇 개가 한꺼번에 우두둑 떨어진다. 이번에는 강아지가 짖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그리 위험한 존재가 아닌 것을 강아지도 알아차렸나 보다. 나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밟힌 도토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토리묵이 먹고 싶어졌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살다 보니, 인생은 단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엄마가 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엄마는 가정에서 자녀를 위해 멀티플레이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도 엄마라는 정체성은 누가 뭐래도 확실하다.


하지만 공교육 교사 대신에 사교육 시장이라는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나의 정체성은 늘 혼란스러웠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은 당연히 아니지만, 자꾸 시장이라고 하니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공교육 교사처럼 나라의 공무원이 아니니 정식 교사라고도 강사라고도 말할 수도 없었다. 청년 예수도 나처럼 호칭에 대해 좀 혼동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한 유대인 지도자가 "선한 선생님(Good Teacher),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느냐?"라고 묻자,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누가복음 18:18)라고 말하였다. 왜 그렇게 대답을 하였을까?


그의 대답 속에는 이 땅에 와야만 했던 이유가 담겨 있다. 바로 선함이 없는 인간을 위해 대속(죄를 대신 짊)하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 속죄 재물인 어린 양이 되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자 목표였던 것이다. 신으로서 인간처럼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고 부활을 통해 영생과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구도자처럼 도를 찾거나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처럼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철학자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사렛 출신 예수,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큰 아들, 치료자, 상담자, 메시아, 유대인의 왕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바로 말씀(Logos,헬라어)이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The Word became flesh)...(요한복음 1:1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being in very nature or form of God)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6-11)


본인은 정작 좋은 교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그 어떤 교사도 흉내 낼 수 없는 좋은 선생님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을 준 것은 인류를 향한 최고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었다. 십자가 형을 치르고 나서 그는 본인이 말한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였다. 몇 명의 제자를 만난 후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찾아가 생선을 손수 구워주고 빵을 때어주는 모습은 좋은 선생님의 롤 모델이 되어 준다. 그것은 바로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었다. 또한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는 내비게이터(Life Navigator)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다시 어부로 돌아가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해 실망하였을 제자들을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삼 세 번에 걸쳐 말해준다. 고기 잡는 어부로서의 삶이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 말이다.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Feed my lamb)"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요한복음 21:1-17).


몇 달 전, 국제학교로 전학을 앞두고 잠시 가르친 D 학생(초3, 시윤)과 버거를 먹으면서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하는 말이 나를 만난 것이 아이 영어 인생에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고 한다. 과연 두 달만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그러한 말을 하는 걸까? 들어보니, 짧은 시간에 말하기에 자신감이 생겼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도 배웠다는 말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누나로 인해 늘 주늑 들어했던 아들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마지막 인사 영상을 영어로 찍어 보냈는데, 누나도 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영어 영상을 보내왔다. 사실 내가 학생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버거를 대접하고자 했던 이유는 쓰기의 원리를 다시 설명해주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문득, 내 인생 내비게이터이가 되어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비유를 통해 또는 직접 사물을 보여주면서 가르쳤던 예수님. 마지막 만남에서 직접 생선을 대접한 이유는 제자들이 '목적이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였던 것이다.


시윤이를 처음 만난 날, 친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틱 장애가 심해 보였다. 정신과 상담도 받고 왔다고 하였다. 리딩 실력이 좋았지만, 말하기에 자신이 없어 보였고, 쓰기 경험도 많지 않아 보였다. 이미 국제학교를 갈 예정인지라 영어에 대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려고 했는데, 문제는 영어가 아니었다. 시윤이는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 부모님께 사랑도 많이 받고 있었고,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발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는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듯 보였다. 틱 반응을 보일 때마다 티 나지 않게 수업을 진행해야 했기에 아이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예전에도 비슷한 학생을 가르친 경험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하나님께 SOS(기도)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지혜를 얻었다. 자연스럽게 교재 내용을 통해 시윤이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문제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마요네즈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누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였다.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는 태어나는 과정을 나누면서 누나의 어려움에 대한 이해와 함께 고마움도 갖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본인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면서, 평범한 사람(normal person)이라는 말에는 사지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가 수영하면서 즐거워하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난 감사한 일인지를 알려주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어떠한 작은 생명체일지라도 귀한 존재임을 서로 눈빛으로 마음으로 공감하였다. 그제야 자신을 사랑하는 듯 보였고 더 이상 틱장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누나 앞에서도 구겨지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영상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시윤이 어머니는 내가 마치 상담사 같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 나도 시윤이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고 변함없는 진리인 하나님이 만든 귀한 존재라는 말 한마디가 그 아이의 마음에 위로와 격려가 된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때마다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손 덕분이다. 정신과 의사였던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을 읽던 중 눈에 띄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따라서 사랑과 기도라는 전통적 해결책은 훌륭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


메타버스의 시대라고 해서 여기저기 난리법석이다. 그 버스를 타야 돈과 권력과 명예를 잡을 수 있고 성공하는 지름길이라 외치는 듯하다. 하지만 난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골프 연습을 중단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저 메타버스와 결합한 스크린 골프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기대를 해본다. 네트워크(network) 망의 연결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미 한국과 미국 LPGA 스크린 골프가 인기다. 이동거리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과 예약 비용도 줄이고, 필드와 같은 환경을 조성한 분위기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쇼핑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미 메타버스에서 명품을 구매하기도 하고, 부동산에 관심 있는 이들은 강남땅과 아파트를 구매하기도 한다.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사용할 가상화폐의 상용화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과연 앞으로의 세상은 어떤 맛일까?

시윤이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을 재민(C학생)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터닝 포인트의 의미를 짧게 말해주었더니, “그러면 샘이 영어 내비게이션이네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그런데, 운전자가 가끔 졸기도 하고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문제지!"라고 말하면서 웃는 순간, 문득 교사는 인생 내비게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결국,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있어 영어는 목표가 아닌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어를 배우는 이유도 좀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나 상태가 되면 도구와 우선순위가 뒤 바뀐 채 우리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뒤돌아보니 나 또한 좋은 교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의 표정과 마음을 잘 읽지 못한 채, 나의 목표와 계획대로 이끌려했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스타일을 살피지도 못했다.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지를 못했다. 최선을 다한다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다만 매일 구식이 되어가고 있는 티칭 내비게이션을 사랑과 기도로 업데이트 중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어떠한 시대가 온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기도 그리고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산을 옮길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영어 참견2>의 첫 단추는 남편과의 사랑이였는데, 마지막 단추를 달고보니 사랑으로 끝나게 된다. 인생은 이렇게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찾고 찾아다녀도 결국은 제자리로 오게 된다. 메타버스 시대에 영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사랑이라니 나도 의아하다. 자신의 형상(image)을 따라 인간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nature)이 바로 '사랑'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선지자(예언자)를 통해 말해줘도 러브레터를 보내도 기적을 보여줘도 도무지 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류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직접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이 모든 내 질문의 답이 되어버리곤 한다. 위대한 이름... 사랑!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사랑이 식어진다니, 인생 끝날까지 사랑해 보아야겠다. 남편도 자녀도 학생들과 이웃도 그리고 영어도 말이다.


시윤이가 보내온 영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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