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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Jan 31. 2024

새벽길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잠들면 믿을 수 없지만 나를 믿어보기로 한다. 몸을 뒤틀며 몇 시나 됐을까 실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한다. 02:15분 아직 멀었으니 다시 잠을 청한다. 얼마나 잤을까 새벽 약속을 떠올리며 또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05:05분 더 누웠다가 깜빡 잠들면 낭패니까 일어나 잠시 여유를 즐기자.     


책갈피가 꽂힌 책을 펼친다. ‘내 심장을 쏴라’ 수리희망병원 501호에 입원 중인 수명과 승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신병원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미쳐서 들어온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나’는 전자요 후자는 승민이었다. 나는 내 인생으로부터 도망치는 자였다. 승민은 자신의 인생을 상대하는 자였다. 승민이 원하는 건 살고 싶다는 것. 그에게 삶이란, 자신의 인생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몇 자 읽지 않았는데 벌써 20분이 지났으니 고양이 세수라도 하고 나가야지. 새벽에 누가 볼 사람도 없고 세수를 하든 말든 남의 일에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호작호작 얼굴 먼지라도 떨고 집을 나섰다.     


가끔 하는 짓이 현명하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앞에 와서 멈춘다. 오늘은 헛발짓하지 않고 바로 왔으니까 현명하다고 봐주겠다. 1층 현관을 나서자 찬 공기와 어스름한 어둠이 나를 감싼다. 전깃불이 아니라면 아직은 어두울 시간이다. 아파트 입구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젊은이는 찬바람만큼이나 독한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있다. 다섯 계단을 더 내려가 스물네 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 앞을 지난다. 점원 아가씨는 계산대 앞 좁은 공간에 홀로 앉아 휴대전화로 지루한 시간을 죽이는 중이다. 남들 다 잠자는 시간 밤새도록 이 거리와 저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단 말인가. 아가씨 혼자, 불안하고 무섭다.     


대로변에는 해가 지나 달이 지나 가로등 불빛으로 낯처럼 환하다.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홍보용 간판 불빛도 거리를 밝힌다. 가방을 짊어지고 길모퉁이 돌아가던 아주머니는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지폐 한 장을 자판기에 밀어 넣고 버튼을 누른다. ‘쨍그랑’ 잔돈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겠지 했더니 시원한 음료자판기다. 영하의 날씨 이 추운 새벽에도 시원한 음료가 당길 정도면 어지간히 열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자주 없는 새벽 외출이지만 밖에 나오니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번째 신호등 앞에는 까만 옷을 입은 청년과 아주머니 아저씨가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고. 병원 앞에서는 환자복을 입은 아저씨가 담뱃불을 끄며 마지막 한입 남은 연기를  품어낸다 길을 지나간 죄로 간접흡연자가 된다. 오늘 새벽에만도  번째 흡연이다. 멀리까지 전해지 담배 냄새는 정말 독하다. 총총 걷던 중년 아주머니 둘은 지하철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까만 롱패딩에 까만색 가방을 똑같이 맞춘  뒷모습이 흡사 쌍둥이 같다.     


네거리 횡단보도 신호등이 곧 바뀔 모양이다. 25초 24초 빨간불이 빠르게 줄어든다. 두 남자는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이쪽에 아저씨 셋은 출발선에 바짝 다가선다. 이번 횡단보도에서 나는 홍일점이다. 도로를 건너는 동안 남자들뿐이라 멋쩍어서 맨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인도에 올라서니 가로등 불빛이 민망할 정도로  길엔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다. 조용한  길을 홀로 걸으며 생각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걸을  있어 감사하다. 새벽을 깨우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하루를 시작하니 감사하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살아가게  것인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갑진년도 벌써  달이 흘러간다. 하루의  시간을 조용히 맞으며 오늘도 희망찬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걷다 보니 내 머릿속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부근임을 알린다. "아빠 엄마는 두 명씩 있었으면 좋겠고 할머니는 열 명, 할아버지는 다섯 명, 나는 혼자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든 나만 바라봐달라는 욕심쟁이 사랑 공주가 깊이 잠들어 있을 집 앞에 도착한다. 조용히 눌러도 '삑삑삑'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다행히 잠자던 공주는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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