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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Mar 12. 2024

외로우면 보이는 것

착각은 자유라지만

1

“섣달 그믐날은 잠자면 안 된다. 자는 아이는 눈썹이 하얗게 쉰데이.” 엄마의 그 말에 정말 자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이 눈썹이 하얗게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눈썹을 지켜야 했다. 섣달그믐밤을 수없이 지났을 엄마는 까만 눈썹을 지켜온 것이 참 대단했다. 얼마나 많은 그믐밤을 지새며 살았을까.


우리는 까만 눈썹을 지키기 위해 동생들과 사촌들이 함께 모여 수까치놀이, 공기놀이, 윷놀이 등 별짓을 다하며 놀았다. 밤샘을 할 열정으로 시작했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다. 견디다 못해 하나 둘 방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믐밤은 깊어가고 깜깜했지만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기에 주변은 히끄므레 했다. 바깥 날씨는 무섭게 추워도 뜨거운 온돌바닥에 등을 붙인 열 명의 아이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 뒹굴며 잠을 잘 잤다.


아침이 되자 이쪽저쪽에서 모두가 웃기는 모양으로 부스스 일어났다. 밤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새초롬하게 달라붙었고 눈썹도 희끗희끗했다. 내 모양은 어떤지 모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그저 웃었다. 어른들은 장난으로 하얀 가루를 아이들 눈썹에 발라 놓았다. 그때 섣달그믐날은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날이었다.


어른들은 근심걱정 없이 마냥 좋아라 웃는 아이들에게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나이다." 그랬다. 넓적한 소똥은 많이 봤어도 말똥은 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다. 말도 못 보고 자란 우리들에게 말똥이란 귀에 와닿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도 말똥은 보지 못했다.


명절 때마다 많은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것도 좋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노는 것이 신나서 명절이 기다려졌다. 우리는  손님을 맞이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큰집이었다.  때는 각자 왔으나  때는 모두 함께 떠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심정은 모르지만 보내야 하는 나는 너무 허전하고 섭섭했다.


모두가 집모퉁이 돌아서 대밭 사이로 줄지어 나갈 때 함께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은 울었다. 또다시 누가 올 것만 같고 누구라도 다시 왔으면 싶었다. 아이의 순수한 기다림을 무시한 그 길 위엔 싸늘한 바람만 불었다.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댓잎 부딪치는 소리만 서걱거렸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모퉁이에 발이 붙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큰 눈을 껌벅거리던 왕눈이 황소도 쓸쓸해 보였다. 소여물 한 줌을 집어주었다. 긴 혓바닥을 내밀며 꼬리를 흔드는 황소를 바라보며 허전함을 달래려 애썼다.


2

그때나 지금이나 섣달그믐은 오고 설날도 온다. 지금의 섣달 그믐밤은 조용하게 지냈다. 설날 아침 어렴풋이 눈을 뜨고 더듬더듬 폰을 찾는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고 일어났다가 또 누운들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시간을 꼭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가. 그럼에도 누운 김에 좀 더 누워있고 싶은 게으름에 민그적 거리는 것이다.


휴대폰은 침대 발끝에서 충전 중이다. 몸을 비틀며 일어나 폰을 잡았다. 방에 콘센트가 몇 개나 있나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침대 옆에도 콘센트가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하나만 사용할 수 있는 단독 콘센트라 폰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다.


눈을 돌리다 보니 벽걸이 에어컨 옆에 눈코입과 양쪽으로 애교머리를 내린 귀여운 아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우리 벽에 예쁜 꼬마 얼굴이 있었던 거야. 순간 눈을 의심하면서도 신기했다. 다시 봐도 눈코귀입이 또렷한 사람얼굴이다.


흐릿한 눈으로 뭘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작고 귀여운 아이얼굴이 맞다.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귀여운 얼굴을 만나다니. 내 눈엔 예쁜 얼굴이고 뇌는 그렇게 인식한다. 갑자기 내 눈이 이상해졌나 누구에게라도 이 상황을 확인받고 싶었다. 손에 들린 폰으로 그 아이 얼굴을 찍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쳐다봐도 여전히 그 자리엔 귀여운 아이 모습이 있다.


 아이의 실체가 뭔지는 알면서도 예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모양이다. 무엇이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면  예쁘게 보이는 걸까? 사람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예쁘다. 속속들이 너무 많이 알면  이상 캐낼 매력이 없으면 싫증을 느끼고 밉게 보일 수도 있다. 반짝이는 매력 하나쯤은 숨겨놓고 사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아침  시간 뭐에 홀린  야릇한 깨달음을 주는  기분이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 또 어떤 핀잔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짝지에게 멀찍이 서서 사진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뭘로 보이는지 느낌대로 말해보라고 했다. 바로 나온 대답은 “사람얼굴이네.” 오예, 진짜 그렇게 보여 신기하네. 그러면 나만 이상한 게 아니네. 미쳤으면 우리 둘 다 미쳤거나 정상이면 둘 다 정상이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보는 눈이나 느낌이 비슷하니까. 이제는 흐릿하게나마 닮아가는 모양이다. 가끔은 가뭄에 콩 나듯이 느낌이 통할 때가 있기는 하다.


오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명절 이렇게 외로울 때는 벽에 붙은 콘센트도 귀여운 사람얼굴로 보인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둘이 함께 있어도 나는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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