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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Wanna be 그리고 Have to be

연극 <20세기 건담기> by reviewerX 잭더리퍼

극단 12언어스튜디오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성기웅은 1930년대 를 주목하고 당시의 언어에 천착한다. 그런 만큼 그는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깃븐우리절믄날>, <소설가 구보씨의 1일>로 이어지는 전작에서 보여 왔듯, 시대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격동의 1930년대를 흘러 다니던 ‘자미나고’ 아름다운 우리말들, 그리고 섞여 들어오기 시작한 왜倭어, 외국어들에 적절한 위트를 더하여 작품이 시리즈로 완성될 때마다 그 새로움은 이 연출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했다. 중구난방으로 관심사가 돌아치지도 않고 오롯이 시대의 언어와 예술가들이라는 하나를 지향해 왔기에 다음 시리즈에 대한 기대도 당연히 컸을 테다. 이번 작품 <20세기 건담기建談記>는 1년 남짓한 영미권으로 외유 이후의 신작이다. 역시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말기를 살아 낸 구보 박태원, 이상을 중심으로 김유정, 구본웅 등을 더하여 예술가들의 일상과 고민을 1930년대의 만담과 라디오극 형식에 담아 전한다. 


경계境界를 넘는 언어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언어를 고집하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예술가들을 삶을 그리는 연출가에게 만담 형식은 시대와 언어와 인물을 연결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될 터였다. 더구나, 이상과 박태원이 자신들을 건담建談가임을 자처하며 입담으로 주변 예술인들에게 웃음을 주는 이야기들을 하였다는 에피소드는 충분하고 훌륭한 착안점이 되어주었다. 형식도 내용도 동기도 모두 언어를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연극 <20세기 건담기建談記>에서는 ‘말談을 쌓아 올린다建’는 그 제목처럼 등장하는 인물들 못지않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대번에 극의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작품에서는 고유어, 외국어를 가릴 것 없는 말장난, 언어유희들이 등장하고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다. 언어의 국적과 갈래라는 문법적인 경계는 물론이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도 언어로 단숨에 넘는다. 인물들의 말은 1930년대 경성 말과 강점기의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한 문장을 구성하기도 하고, 일본식의 영어 읽기도 등장한다. 외국어 읽기와 우리말의 음가가 유사해 벌어지는 말장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쉴 새 없이 빠르게, 그리고 꼭꼭 정확하게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는 시대의 말들은 넘치게 많아 흐트러지거나 흘려버리게 될 것 같지만 만담 형식, 라디오 극 형식에 얹혀 전달되면서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하는 집중력을 만든다. 물론 듣는 속도보다 이해의 속도가 한 발자국 정도 느린 과정이 순환된다. 그럼에도 듣고 이해하고 감탄하여 웃음 짓게 만드는 4박자가 반복되어 존재한다. 의식적으로 언어의 발음과 문자요소를 맞춰가는 작가의 언어 감각은 여전히 감탄스럽다.


게다가 상상력을 더하여 “아메리카 스탄-훠드 대학에 지G-디D-드라곤Dragon 박사의 최신실험에 따라 지구의 척점을 향한 초 단파장 주파수가 21세기 근 미래로부터의 신호로 잡힌다.”며 자신들의 대화가 21세기 즈음에 수신, 재생된다는 큰 설정까지 던져둔다. ‘라디오 극형식도 추가될 것임’ 을 공표하면서 내용의 자유도를 늘렸다. 21세기 영화의 장면(봉준호<괴물>)을 한참 설명하는 20세기의 박태원과 이상이 이렇게 만화 같은 설정 아래에서는 전혀 이상하거나 의문스럽지 않다. 이러다 보니 작품 속의 언어는 1930년대의 20세기와 현재의 21세기를 순식간에 오가며, 동시에 언어 그 자체를 듣는 재미와 이해하는 즐거움을 안긴다.


경계警戒해야 할, 경계境界가 허물어지는 의식들

시대의 언어에 집중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형식으로 확장하고 가다듬은 작가의 노련함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언어적 재치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거기까지다. 만화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같았던 1막의 픽션은 논픽션의 경계를 넘어온다. 그런데 이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보였던 넘나듬의 미덕이 아니라 침범에 가깝다. 자유롭게 녹여진 언어를 향유하다보니 역사의식이나 작가적 소명까지 말장난에 녹아 허물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사실의 왜곡들이 2막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되려 부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언어의 빠른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큰 장면들은 예술가들의 연애담과 죽음이다. 전원풍의 소설을 남긴 작가 김유정은 ‘궐녀’라 칭해지는 어떤 여인을 애타게 짝사랑하는 중이다.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다. ‘궐녀’로 불리는 이는 역사 속에 실존한 명창 박녹주이다. 실제 기록에도 김유정이 박녹주를 연모하였다, 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김유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스토킹에 가까운 사랑 아닌 사랑을 했다. 협박편지와 위협을 기본으로 한 그의 외사랑은 연극 <20세기 건담기建談記> 속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희화화 된 병으로 처절하면서도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김유정의 죽음과 연애는 동정을 받고 슬픔을 유도한다. 잘못된 부각으로 인해 사실은 왜곡되어 전달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은 현실을 흐린다. 작품은 이렇게 여성의 이야기가 기반이 되면서도 여성은 정작 중요한 존재로, 존중받는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상의 아내와 제비다방을 함께 운영하던 애인, 신여성이 되길 바랐던 박태원의 딸 등 다섯 남자의 입을 통해 스쳐가듯, 의미 없이 마구잡이로 다뤄지는 여성들의 모습은 꽤나 불편하다.


또, 이상이 김유정에게 동반 자살을 제안했다는 에피소드는 충격적이지만 꽤 유명하다. 불행한 예술가들의 낭만적일 정도로 불행한 삶, 유명한 이들의 더 유명하고 다소 웃기는 병명(치질), 그리고 일종의 우정과 연대의 러브스토리. 많은 작가들이 흥미로워하고 소재를 발전시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다. 고개를 갸웃할 수도, 예술가들의 예민한 감수성이 낳은 기이한 언행으로 웃음과 흥미를 줄 테니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김유정이 직접 등장했으니 당연히 이 에피소드가 시그니쳐 마냥 존재한다. 이것은 건담기 1막의 한 장면으로 포착되어 있고 이 후 극이 두 예술가의 죽음으로 흘러갈 것임을 보이는 단서가 되어준다.


시인 이상은 “그저 살아보고 싶어서”라는 말과 함께 도일한다. 그리고 이 후 불령선인으로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예술가의 기질을 발휘한다. 작품 속 이상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 독백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죽어가는 작가의 이야기 형식은 일본 만담의 형식인 라쿠고落語다.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는 이 장르는 이상의 몸과 행동에 일본의 그것을 입혀두었다. 이상은 다다미방에서 일본의 옷을 입고 일본식 부채를 쥐락펴락하며 일본식의 만담으로 눈을 감는 그 순간을 맞이한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라는 무거운 역사의식까지는 없다 해도, 이상에게 라쿠고를 투사하여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은 죽는 순간까지 예술가였다는 것을 은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평생 사랑했던 종이와 펜과 몇 마디의 시 구절이면 충분할 터였다. 공간적 배경이 일본이어서 일본에 남아있는 만담의 형식을 이상으로 하여금 구현하게 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일차원적이다. 덧입힐 것이라면 타당한 이유를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작품 내내 그런 단서들은 찾을 수 없었다. 옆자리 관객은 이상의 죽음에, 그리고 사실과 다른 배경을 가지며 죽어간 김유정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고 슬퍼했다. 역할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을 칭찬해야 하는 것인지, 왜곡된 정보와 비뚤어진 의식에도 불구하고 미장센을 살려낸 연출가의 기지에 감동해야 하는지 혼란이 오는 순간이었다.


시대를 구현하는 자는 어느 정도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과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 허나 <20세기 건담기建談記>는 그렇지 못했다. 단순히 그 어느 시대가 되었든 예술가의 낭만으로만 내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작품은 1930년대일 필요도, 그 많은 언어들이 섞여 언어유희를 낼 필요도 없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들과 재미를 주던 요소들이, 눈을 비비고 연출을 기억하고 다시 보아야 했던 일들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식인과 시대적 지식의 첨병 역할을 했던 일본문화를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해도, 모두가 독립투사처럼 싸워야만 하는가 되묻는다 해도, 시대를 조망하는 극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최소한의 역사의식이다. 저항하지 못했음을 ‘어쩔 수 없어서’로 귀결 짓는 작가의 생각과 그 시대는 ‘다들 그랬을거야’를 보여주는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 앞에서 과연 시대를 사실적으로 마주한 것이라며 박수쳐 줄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시대적으로 체념하고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는 어떤 순간에도 진실이 아니다. 작가로서 존경해 마지않는 1930년대 지식인에 대한 판타지를 모던 보이들에게서 발견한 후, 너무 맹목적인 미화와 숭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예술가라는 자부심에서 오는 자의식이 역사의식을 매몰시킨 것은 아닌지.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것들을 경험이라는 이름아래 10년 세월이라는 안일함 아래 피상적으로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닌지. 시리즈를 종결하며 또는 전환하며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1930년대는 ‘깃븐 우리 절믄날’이 라는 몇 마디의 어구로 갈무리될 만큼 아름답기만 했는가 말이다.


이상의 죽음 이후 작품은 친일 성향으로 돌아선 지식인 구본웅과 갈 곳을 잃어 한탄하는 박태원의 모습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극 내내 분위기와 잡일을 담당하던 카페 시종 수영이는 징병되었다. 무거운 세상이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라는 작가의 푸념 아닌 푸념은 즐거웠던 언어유희와 대조되며 그 마저도 무슨 소용인가라는 절망과 한탄으로 마무리 한다. 하지만 앞서 풀어 놓은 그의 모던보이 로망 몸통부분에 비해 비판적 역사의식 인양 얼버무려 놓는 말미 수습의 부분은 기만에 가깝다. 대조의 아이러니라는 관대한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것은 관객의 너그럽고 너그러운 관용일 뿐이다.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넋두리와 허공을 향한 공허한 시선은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얄팍한 꼼수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성기웅의 박태원과 이상의 만담 콤비는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2007)에서 시작하여 차곡차곡 말을 쌓아올려 <20세기 건담기建談記>(2017)에 이르렀다. 21세기를 10년 동안 살아내면서 이미 그의 스타일은 정해졌으나 읽혔고 빛바랬다. 지금은 1930년대를 맛보이는 피상적인 스타일에 다름과 신비감을 느끼며 맹목적으로 열광하던 10여 년 전이 아니다.


그렇다면 1930년대, 바로 그 시대를 고집하는 작가가 그 다음 도약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은 분명 답습이 아닐 것이다. 표피만을 간질이듯 언어를 훑어내고 그 시대 예술가들을 동경하여 삶을 추적하고 각색해 그려만 내는 것을 넘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놓여 피고 진 시대를 마음으로, 다층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되어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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