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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진짜 혐오가 되어버린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by reviewerX 나타샤

‘혐오’의 사전적 정의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누군가의 일생이 싫고 미울 수 있지만 작품의 제목에 그런 단어를 붙이는 일은 드물다. 그럼에도 저 ‘혐오’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들을 압도할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뿜도록 제목에 떡 붙여 놓은 데에는 숨어있는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혐오스런’이란 강력한 제목에 끌려서 ‘도대체 이건 뭘까?’하며 보게 되고 그 강한 이미지만큼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제목의 역설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강력한 제목만큼의 반전 효과 없이, 진짜 혐오스런 모습만 내내 보여주다 끝나버린다.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하 마츠코)>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웃들에게 ‘혐오스럽다’고 손가락질받던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는 어떻게 죽었고, 왜 혐오스런 모습이 되었을까를 조카인 쇼가 추적해가면서 그녀의 인생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과 영화의 틀을 그대로 뮤지컬로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제목이 주는 강력한 부정적 이미지 ‘혐오’가 진실과 반전된다는 역설의 효과는 가져와야 동명의 제목을 붙인 이유가 살아난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강력한 부정적인 제목을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설과 영화에서는 제목의 역설이 잘 드러나 있다. 조카 쇼가 주변 인물들과 사건기록을 통해 밝혀낸 진실은 마츠코는 아이들을 사랑했던 밝고 유쾌한 교사였는데, 불행한 사건들과 남자들을 통해 사람들이 욕하는 혐오스런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츠코는 불행한 사건들 속에서도 항상 사랑받으려고 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왔고, 가족을 떠났고 돌아가지 못했지만 항상 가족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혐오스럽다는 평가와는 정반대의 심성과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형식 면에서도 이 제목의 역설을 잘 풀어낸다. 그녀의 불행한 선택 하나하나를 코미디와 경쾌한 음악, 빠른 리듬으로 표현하면서 그녀 인생의 모순성을 잘 보여준다. 신파극이 아닌 이상 한 여자가 점차 망가져 가는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건 현대극에서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하는 일마다, 만나는 남자마다 최악인 여자의 인생을 코믹으로, 흥겨운 음악과 춤으로 표현하면 관객들은 거기에서 오히려 큰 페이소스를 느낀다. 영화가 이 부분을 훌륭하게 해냈고, 평단과 관객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반면, 뮤지컬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뮤지컬 <마츠코>는 주인공이 파멸해가는 사건들의 전달에만 충실할 뿐 마츠코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상황과 감정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마츠코가 불행해진 원인의 근본에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고, 성격적으로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순진함’이 있다. 이 왜곡된 욕망과 성격 결함은 아픈 동생만 사랑하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고 마지막 대사 ‘다녀왔습니다’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전사는 잘 소개되지 않는다. 모든 불행한 사건들은 이 욕망과 성격이 삐거덕거리면서 작동한 것이고 그때마다 그녀는 열심히 해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불행한 사건들이 평면적으로 나열될 뿐 이 핵심줄기가 일관성 있게 부각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후 사건들에서 마츠코의 선택이나 감정에 공감이나 연민이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캐릭터에서 선택과 집중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뮤지컬은 류와 쇼의 캐릭터에 비중을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려고 하는데, 135분의 상연시간 내에 마츠코의 불행한 사건들만 얘기해도 벅찬데, 거기에 자꾸 류와 쇼의 이야기까지 엮으려 하니 이야기가 분산되고 결국, 앞서 말한 ‘혐오’의 역설이 부각되지 않는다. 특히 마츠코와 큰 접점이 없고, 전체 주제와도 동떨어져 보이는 조카 쇼가 인형 놀이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을 확인하고 아버지에 의해 거부된다는 에피소드는 제대로 그 의미가 전달되지도 않으면서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의 색깔을 보자. 창작진들은 영화의 분위기를 뮤지컬로 옮기는 것을 저어했는지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음악적으로, 영상적으로 이 역설의 법칙을 잘 활용해서 불행한 이야기를 블랙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뮤지컬은 이런 역설의 코드가 없으므로 불행한 사건들이 나열되고 그에 맞추어 음악 색깔도 우울하다. 마츠코가 부르는 ‘스트로 베리 봉봉’과 감옥에서 부르는 노래, 류를 기다리며 감옥 담장에서 부르는 노래 외에는 경쾌하고 밝은 노래가 없다. 특히 여러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음이 변주되고 변형되는데 그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고 산발적으로 흩어져있기만 하다. 결국에는 음악이 각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지도 못했고, 사건을 전개시키지도 못한 셈이다.    


이상의 점들에서 보면, 전반적으로 소설과 영화의 원 소스가 있는 작품을 뮤지컬이란 형식에 얹어서 부각시키려고 했던 주제(컨셉)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연출은 인터뷰에서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규정짓는 건 외부 시선이다”라고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했다. 즉 마츠코의 선택보다는 사회가 그녀(성노동자, 범죄자)를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이 문제라는 것인데, 그 부분이 부각되려면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차별적인 대우가 상황으로 제시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감옥에서 합창으로 부르는 한 넘버의 가사정도로만 이것을 표현했을 뿐, 그나마도 이런 주제는 잘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게다가 문제의 초점을 차별적인 외부 시선으로 돌리면 마츠코가 사랑스럽고 최선을 다해 살아 온 여자라는 점이 부각되지 않는다. 또한 연출은 아무도 마츠코를 잡아주지 않아서 이렇게 죽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고 극중에서는 쇼가 마지막에 “왜 아무도 고모를 잡아주지 않았어요?”란 대사를 하는데, 이 부분 또한 작품의 골간과 맞지 않는다. 


마츠코는 고향을 돌아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고, 직접 남자들을 선택했고, 미용기술도 있었는데 하지 않고 노숙자처럼 살았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불행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다. 언론에 밝혀진 창작진의 연출의도를 보고 있으면 이는 제작진 내에서도 작품에 대해 잘 정리가 안 된 것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핵심적으로 부각시켜 강조할 부분을 잡고 그것을 뮤지컬 무대에 어떤 형식으로 효과적으로 보여줄지 정리하지 못하고 방대한 텍스트를 부조화스럽게 끌어안고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 제목의 역설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괜한 사회 비판만 갖다 붙여 놓았으니 작품이 몰입감을 잃고 뒤로 갈수록 쳐져 버린다. 제목과는 반전되는 마츠코의 사랑스런 일생이 드러나야 하는데, 관객들은 정말 혐오스런 일생만을 보고 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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